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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후 미우 Dec 19. 2018

볼펜

만약 시험을 치르는 날 유일하게 들고 간 필기구가 나오지 않는다면?

지난 월요일에 나는 대학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렀다. 시험은 교수님께서 불러주시는 이야기를 노트 테이킹으로 필기를 해서 스마트폰으로 통역을 녹음해서 제출하는 것. 워낙 자신 있는 분야라 기세등등하게 통역 부스로 들어가서 시험을 치르고자 했는데, 교수님께서 불러주시는 이야기 중 "안녕하십니까."라는 문장을 적은 이후 볼펜이 돌연히 나오지 않았다. 열심히 입김으로 불고, 노트 테이킹을 하는 종이에 긁으며 비벼 보았지만, 매정하게도 볼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교수님께서는 계속 통역해야 할 내용은 말씀하고 계셨기 때문에, 일단 급한 대로 종이에 꼭꼭 눌러 쓰면서 아주 희미하게 나오는 볼펜 잉크와 선 자국을 남기면서 필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교수님께서 "이제 녹음하세요."라고 말하자마자 급히 사정을 말씀드리고 가방 안의 샤프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워낙 당황한 탓에 조금까지 기억하고 있던 내용은 사라지고, 꾹꾹 눌러 쓰면서 선으로 남긴 필기 내용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착하자' 되뇌며 녹음을 하려고 했지만, 노트 테이킹한 종이를 보면서 '음? 그러니까 뭐였더라?'라며 자꾸 앞이 막히고 말았다.

자신 있는 통역에서 이렇게 시험을 힘겹게 치를 줄은 미처 상상도 못 했다. 그동안 너무 잘 나와서 항상 애용하던 볼펜이 이날 말썽을 일으킬 줄 누가 알았을까? 괜히 사람들이 '혹시나 모를 예비용 필기구'를 항상 들고 다니라고 말하는 건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왜 하필 나는 통역 부스 안에 들어갈 때 평소 애용하던 샤프는 책상 위에 두고, 볼펜만 들고 간 건지 모르겠다. 정말 할 수만 있으면 그때로 돌아가 다시 시험을 치르고 싶었다.

나 하나 때문에 "교수님! 잠시만요! 볼펜이 안 나와요! 샤프 좀 가지고 다시 해도 될까요!?"라며 초반에 말할 수도 없었고, 머릿속은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 어떻게 해야 해!?' 생각으로 가득 차서 제대로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이 되어봐야 그 사람의 진짜 실력이 드러나는 법이라고 하는데, 나의 진짜 실력은 고작 이 정도였던 것 같다. 통역에서 노트 테이킹에 의존할 수 없는 상태에는 최대한 핵심을 해두고 잊어버리기 전에 통역해야 했는데, 인사문 순차 통역이라 내용도 제법 긴 데다 샤프를 가져와서 선을 따라 적으려다 기억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참, 사람의 앞날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다는 걸 이날 몸서리 치도록 깨달았다. 과연 마지막 통역 시험은 어떤 결과가 될련지….

만약 시험을 치르는 날 유일하게 들고 간 필기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험 시작과 함께 알게 되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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