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자(1368년), 장사성에게 극진하게 대우받던 그 시절의 소주의 문인과 지성인들은 화를 면하지 못했다. 최고의 문인이자 천재 시인 고계(高啓, 1336~1374)는 일단 호부시랑戶部侍郞에 중용되어 ‘원사’元史까지 편찬하지만 끝내 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에 처해졌고, 이름난 학자 양기楊基는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장우張羽는 호송 도중에 자살했다. 이들 이외에도 문화의 도시 소주를 빛내던 많은 지식인들이 살해되었다. 주원장의 강남 지식인에 대한 탄압은 명나라 초기, 소주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지식인은 아니지만 주원장과의 대립 속에서 굴곡진 인생을 살아야 했던 사람이 있었다. 심만삼(沈萬三, 1330~ 1379)이라는 상인이자 당대의 부호이다. 소주 시내에서 30㎞ 남동쪽, 곤산崑山 지역에 주장(周庄 Zhōuzhuāng) 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은 북송 시대인 1086년에 주적공周迪功이 전복사全福寺를 세웠고, 그 은혜에 감사한 마음으로 주적공의 성을 따서 부른 데에서 유래했다. 주장은 강남 제일의 수향이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수향 중에서 아름답기로 유명해서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소주의 원림(정원)들이 인공미를 보여준다면, 주장의 마을 길과 원림은 자연을 이용해서 만들어져서 더욱 아름답다. 인문환경과 자연환경이 조화를 이룬 마을은 특히 화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었다. 마을 중심에 있는 쌍교는 세덕교世德橋와 영안교永安橋가 이어져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데 , 진일비陳逸飛의 그림으로 유명하다. 주장 마을을 재해석한 우관중吳冠中(중국 현대 미술의 거장)의 수묵화도 유명하다.
쌍교의 사진과 진일비가 그린 그림 속의 쌍교
쌍교에서 조금 내려가면 주장의 상징적 건물인 심청沈廳이 있다. 심만삼의 후손 심본인이 건륭제 시대인 1742년에 건축했다. 2,900㎡ 규모로 100칸에 이른다. 심청엔 심만삼이 장사의 신이 되어가는 과정 이야기가 동판으로 제작되어 걸려 있다.
하지만 심만삼이 살았던 시대는 상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은 시대이다 보니 심만삼에 대한 정사 기록은 별로 없고 주로 야사형태로 전해졌다. 원元 말기, 심만삼은 남순南浔 출생했지만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주장으로 옮겨와 성장했다. 심만삼은 갈대가 무성한 저지대 습지였던 저우장 주변에 곡식과 유채, 뽕나무를 재배하여 엄청난 수확을 거두어서 인생 초반기에 돈을 벌었다고 한다.
주장周庄 심청沈廳
하지만 본격적으로 부자가 된 길은 소주의 거부 육덕원陸德源을 만나서 그의 도움을 발판으로 삼으면서였다. 심만삼은 육덕원의 해상 무역을 이어받아서 해적들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그리고 저장성 일대에서 생산되는 실크, 도자기, 공예품을 수출하고, 해외의 보석과 향료를 수입하는 대외 무역을 통하여 빠른 시간 안에 강남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심지어 육덕원은 인생 말년에 도교에 심취애 자신의 애제자였었던 심만삼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사라졌다는 말이 있다. 육덕원은 심만삼의 인생에 신비한 귀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주원장이 장사성의 소주성을 함락하고 황제로 역사에 등장하자 그동안 성공을 향해 달려가던 심만삼의 운도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그에게 육덕원이 운명의 귀인이었다면, 주원장은 악연의 인물이었다.
심만삼은 소주를 근거지로 삼아 주원장에 대항했던 장사성의 시체를 운반해서 수습하는데 힘을 보탠 일로 인해, 주원장의 미움을 샀다. 주원장의 성격을 모를 리 없었던 심만삼은 알아서 권력자인 주원장에게 도읍지, 남경南京 성을 쌓는 일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심만삼이 사재를 털어 성의 1/3을 쌓고, 주원장의 백만대군이 나머지를 쌓는데, 심만삼이 딱 3일 먼저 완공했다. 자기보다 잘나고 부자인 사람을 보는 성미가 아닌 주원장은 기분이 상했다. 심만삼은 다시 백만 황금을 털어 성을 쌓았던 군사들을 위로하겠다고 말했지만, 주원장은 이 정도에 앙심을 풀리가 없는 인간이었다. 주원장은 황제가 백만대군을 위로해야 하는데 심만삼이 잘난척을 한 것 뿐이었다.
심만삼이 장사의 신이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한 심청沈廳의 동판
여기서 유명한 주원장의 '이자 벌칙'이 나왔다. 주원장은 심만삼에게 동전 한잎을 주었다. 그리고는 다음날부터 하루에 두 배씩 이자를 갚으라고 했다. 다음날 두잎, 그 다음날 네잎, 한 달이 지나니 무려 536,870,912냥 이었다. 주원장은 심만삼의 남은 재산을 빼앗았다. 그리고 주원장은 심만삼의 재산을 홀딱 벗겨 먹는 것도 모자라서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주원장의 부인, 마왕후의 간언으로 목숨만 간신히 건졌다.
이후 고향에서 수만리 떨어진 운남云南으로 귀양간 심만삼은 그곳에서도 상업의 기회를 찾아냈다. 차마고도茶馬古道에서 다시 장사를 하다가 운남의 산속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일가 친척들 중에서도 주원장의 박해를 피하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나왔다.
가운데 사진의 가운데 붉은 색 요리가 만삼제万三蹄이다. 나머지 사진은 심청의 모습들.
오늘 날, 주장에 가면 기념품으로 진공포장된 돼지 족발을 파는 가게를 쉽게 볼 수 있다. 그 음식은 '만삼제万三蹄'로 주장의 향토 만찬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 음식에 얽힌 설화는 이렇다.
황제가 된 주원장이 심만삼의 집을 방문했다. 그러자 심만삼은 심 씨 집안에서 귀빈을 모실 때 필수 메뉴인 돼지족발 요리를 준비하여 주원장을 대접했었다. 애당초 주원장이 심만삼의 집을 찾은 목적은, 눈에 거슬리는 심만삼의 흠집을 잡기 위한 건수를 만드는 것이었다. 돼지 족발을 앞에 두고 심만삼과 주원장의 치열한 심리전이 펼쳐졌다.
심만삼의 입장에서는 황제 앞에서 칼을 쥐는 것은 역모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칼로 족발을 자를 수는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미천했던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주원장은 통상적인 문자 사용에도 매우 민감하였는데, 문자옥文子獄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었다. 예를 들면, 주원장은 승僧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은 자신의 승려 생활을 비웃는 글자로 금기어로 만들었다. 당연히 황제의 성씨인 주(朱zhu)와 발음이 같은 돼지(猪 zhu)를 돼지로 부르지도 못하게 되었다.
심만삼은 족발에서 뼈를 뽑아내아 그것으로 족발을 잘라서 주원장이 먹도록했다. 그러자 주원장이 ‘요리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돼지 족발이라고 했다가는 주원장의 발을 먹는 것이 되므로 목숨이 날아갈 판이었다. 심만삼은 자신의 무릎을 가리키며, ‘만삼제'(만삼의 발굽)이라고 대답하여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주장과 인근 지역에서는 오늘날까지 만삼제는 칼을 쓰지 않고 뼈로 잘라 먹는 풍습이 전해져 내려온다. 아마도 권력자 주원장에 대한 소심한 복수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