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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완 Apr 10. 2024

여수밤바다

창밖은 쓰레기장

여수에 가기로 결정했을 때, 사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집에 있으면 자꾸 사람이 느슨해진다. 글을 쓰다가도 휴대폰을 건드리고, 그림을 그리다가도 어느새 침대에 누워버린다. 시작은 독서였는데 유튜브 영상으로 끝나는 일이 예사다.

편안하니까. 집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이 자꾸 나를 풀어지게 한다. 그래서 어딘가로 훌쩍,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게 떠나고 싶었다.

대충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뭐라도 할 만한 곳에, 낯선 곳에 나를 놓아보고 싶었다. 굳이 여수여야 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여수가 됐지만.


내가 사는 지역에서 여수로 이어지는 직행 버스가 없다. 여수에 가기로 마음먹고 난 뒤에 알았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환승해야 했다. 고속버스 환승이라니.

서울 가는 길에는 잠을 잤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탓에 잠이 부족했다.

서울에서 여수로 이동하면서는 그림을 그렸다. 창밖에 보이는 나무며 구조물을 마음에 드는 대로 그렸다. 눈에 드는 풍경을 문장과 구절로 적어놓았다. 언젠가 그 문장들이 녹은 글을 완성하고 싶다.

고속버스에서 흔들리며 그린 그림

여수에 내려보니 잔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물방울의 흔적 같은 것들이 흩날렸다.

숙소는 바다와 아주 가까웠다. 베란다에서 내다보는 풍경은 쓰레기장이었다. 정말 쓰레기장. 고철과 분리수거된 폐기물들이 몇 톤쯤 쌓여 있고, 집게 굴삭기가 폐기물 더미를 헤집고 있었다. 일상의 흔한 분리수거장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우스웠다.

당황스러웠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너무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네가 굴러온 돌이야, 하고.

대충 생각해 봐도 이 건물 옆에 쓰레기장이 생긴 게 아니라 저 쓰레기장 옆에 11층짜리 원룸건물이 들어선 게 맞을 것 같았다. 이 건물은 박힌 쓰레기장 옆에 굴러온 돌이고, 나는 그 굴러온 돌에 굴러온 돌이다. 그 압도적이고 본격적인 쓰레기장을 보며 그 이상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친구와 한바탕 웃고, 넘길 수는 없어서 또 한 번 보며 웃고, 걷다가도 그 얘기를 하며 웃고, 틈날 때마다 웃었다. 사람들이 왜 기쁠 때 눈물을 흘리고, 슬플 때 화를 내는지 정말 알 것 같았다.


게장을 먹으며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친구는 여수에서의 일정을 물었고, 나는 정해둔 일정이 없다고 했다. 진짜로 없었다. 하고 싶은 일과 가고 싶은 곳은 있었지만 일정의 형태로 정리해두지 않았다.

게장을 먹고, 바다를 보고, 글을 좀 쓰고, 그림도 그리고, 옷을 가져오지 않았으니 구제샵에서 옷을 살 생각이었다. 딸기모찌를 먹고, 공원을 좀 걷고, 어느 카페에 들어가서 멍을 좀 때리다가 친구가 제안한 짚트랙도 타야 했다. 미리 찾아둔 소품샵에서 쓸모없어서 가치 있는 것들을 좀 사고, 독립서점도 한 군데쯤 들렀다가 원데이클래스도 하나 하고 싶었다. 일주일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게장을 먹고 우리는 산책을 했다. 걸음의 끝에는 구제샵이 있었고, 나는 발목 넘게 내려오는 빨간 체크무늬 스커트와 펑퍼짐한 흰색 후드티를 샀다. 구제샵을 나오니 이순신광장이 금방이었다. 딸기모찌를 샀다. 카페에서 음료를 테이크아웃해 밤바다와 야경을 보았다. 하루가 길었다.

하루가 얼마나 길었냐면, 출발하며 생각한 '할 일'의 40프로 남짓을 끝내버릴 정도였다.

얌전하게 흔들리는 밤바다, 멀리 빛나는 야경, 콘크리트 부두와 그 앞에 정박해 쉬는 배, 공원 저편에서 도란도란 수다 떠는 외국인 무리, 알맹이가 큰 딸기라떼, 춥지 않게 서늘한 밤공기. 그 모든 게 한 번에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남은 6일간 뭘 하면 좋지?


추신. 필자의 MBTI는 ENTP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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