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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완 Apr 10. 2024

눈을 막고 코를 감고 3초

하늘을 날았다

전날 새벽까지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 느지막이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11시였다. 아침 일찍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는 건, 편견이다. 늦잠으로 잡아먹은 그 시간이 아까운 내 마음은 들어라. 너는 편견에 절었다.


첫 식사로는 생선구이 백반을 먹었다. 생선이 세 종류나 나왔다. 맛은 무난했다.

미리 찾아둔 소품샵에 가기로 했다. 지난밤 갔던 이순신광장까지 땡볕을 맞으며 걸었다. 나는 걸으며 아주 많은 사진을 찍었다.

바싹 마른 낮은 덤불에 핀 솜털 같은 것. 꽃인지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목화를 닮은 작은 것.

이제 막 꽃무더기 사이로 잎이 돋기 시작한 벚나무. 보도블록 사이에 솟은 보라색 들꽃. 나무 기둥에서 자라는 풀잎들과 어느 중국집 벽에 빼곡히 붙은 입시미술 시연작들. 제 자식이 그려낸 실기 연습작들을 귀하게 받아 벽지 위를 덮었을 마음에 대한 상상.

숲이라 불러도 좋을 나무 언덕과 그 아래로 자리한 구식 주택들, 중앙에 박힌 새하얀 5층 빌라. 남정중 돌벅수. 자갈밭에 핀 민들레. 기울어진 전봇대. 문이 활짝 열려 있는 문 닫은 신경외과. 웃기게 생긴 애호박이 빨간 소쿠리에 담겨있는 모습. 작은 담벼락을 넘어야 들어갈 수 있는 편의점 입구와 담벼락을 넘도록 설치된 나무 계단.

이순신 광장 근처에서 소품샵을 두 군데나 들렀다. 동백을 테마로 한 소품샵을 하나, 거북을 테마로 한 소품샵을 또 하나.

동백을 테마로 한 모빌을 하나 샀다. 9월이면 친구의 아들이 태어난다. 거북을 테마로 한 소품샵에서는 목걸이를 사고 소원을 빌었다.

원래 가려고 했던 소품샵 한 곳이 이전을 했더라. 제법 멀리로. 나쁘지 않다. 긴긴 일정 속에 갈 곳이 늘어난다는 건.

갓버터 도넛을 한 상자 사고, 버스정류장에 앉아 책을 읽었다. 오늘은 친구와 함께 짚라인을 타기로 했다. 짚라인장에 도착해 친구를 기다리며 또 책을 읽었다. 금년도 젊은 작가상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문학은 패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다시 곱씹었다.


짚라인을 타기에는 날이 추웠다.

치마 속에 바지를 덧입고 안전장치를 착용하니 꼴이 우스웠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가 나와 안전장치 사이에 정형화되지 않은 모양으로 구겨져 있었다. 짚라인을 타기 위해 빨간 계단에 서서 기다리는데 몸이 떨렸다. 바람이 막 불었고, 내 몸을 떨게 하는 게 바람인지 두려움인지.

굵은 와이어에 안전장치의 체인을 걸고, 탑승요령을 들으니 확신이 섰다. 나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거다.

"왜 내 기저귀 안 사 왔어? 사주기로 했잖아. 나 쉬하면 어떡하지? 네가 생일선물 소원권을 여기에 쓰지만 않았어도."

내 말에 친구는 나만큼이나 떨면서 "씨발, 미안."이라고 답했다. 등 뒤에서 '이제 무를 수 없다'는 안전요원의 통보가 들리고,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하늘을 날았다. 맞바람이 불었다. 우리 바로 앞 차례에 홀로 짚라인을 탔던 가벼운 아이는, 와이어의 중간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와이어 중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내린 뒤에야 출발한 안전요원에게 구출되었다.

맞바람이 불었다. 와이어를 타고 뚝 떨어지는 그 3초 동안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찰나, 심장이 떨어지는 그 느낌. 이제는 생경할 것도 없는 그 느낌에 강한 맞바람이 덧입혀졌다. 심장은 내려앉고 숨은 쉴 수 없었다. 비명을 내지를 수 없었다. 눈꺼풀로 눈을 힘껏 막고, 코를 감고, 입을 앙다물고. 그 순간 내 얼굴은 어떤 구멍도 기능을 하지 못했다. 달걀귀신처럼. 안전한 철제 구조물 위에서 안전요원이 눈을 뜨라고 소리쳤다. 친구가 신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눈을 떴다.

눈을 떴다. 회색빛 도는 푸른 바다와 그 위에서 곧게 살아가는 나무들. 나무 숲 아래에는 크지 않은 섬이 있겠지. 섬보다는 작은 암초들이 여럿 있고, 물 아래에 흐르는 검은 해초 같은 것들도 보였다. 살면서 또 육안으로 보기는 어려울 장면. 나는 그제야 소리를 질렀다. 우와, 와아.

짚라인에서 내려와 친구는 내게 물었다. 봤어? 암초와 바다와 저 멀리 섬과 손톱만 해진 배 중 뭘 봤냐고 묻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봤다고 했다. 그 애가 봤느냐고 물을 수 있는 모든 걸 보았으니.


숙소까지 걸었다. 벚꽃잎이 유치마냥 빠져 흩날리고, 그 자리에 새 잎이 돋는 벚나무길을 걸었다. 돌산대교를 걸었다. 그 길을 걷는 건 나와 친구뿐이었다. 한 시간을 걸었다. 떨어진 벚꽃 탓에 꽃나무처럼 보이는 덤불과 온통 코랄색으로 통일된 지붕의 마을을 보았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마트에 들러 뻥튀기와 커다란 오감자를 샀다. 밤에는 아직 쌀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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