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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완 Apr 11. 2024

꽃과 복권과 타륜과 항구와

프리티 우먼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어제 탄 짚라인에 대한 낙서. 그리고 젊은 작가상 마저 읽기. 태국어 공부 대신 태국 드라마 조금 보기. 전날 먹다 남은 마라탕 먹기.




올해 젊은 작가상 수상작 중에는 빚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사랑 탓에 떠안은 빚에 시달리던 청춘이 꿈속에서조차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지 못하는 이야기. 그 청춘이 로또를 사려다가 번호 하나를 정하지 못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 결국에는 정하지 못한 번호 하나를 1로 채운  마음에 꽂혔다. 로또를 사기로 했다. 그 청춘이 우연히 본 숫자들로 로또를 샀듯, 나도 나의 우연과 필연들을 떠올려 번호를 채웠다. 하나가 부족했다. 12시 36분이어서 36을 할까, 36은 너무 애매한 숫자가 아닌가? 365의 36, 예쁜 숫자 같기도 하고. 마침 들어온 친구에게 말했다.

30부터 45까지 중에 하나를 골라봐.

친구는 39를 골랐다. 그 애가 36을 골랐더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36으로 정했을 텐데.

39? 너무 애매하지 않아? 36은 어때?

내 말에 친구가 똑같이 말했다. 36? 너무 애매하지 않아? 39가 낫다.

이미 고른 번호 5개 중 3개가 1번대, 나머지 두 개는 각각 10번대와 20번대였다. 다른 번호들이 다 작은 수에 몰려있으니 마지막 하나는 좀 더 큰 수인 39로 하기로 했다. 그러자 친구가 물었다. 만약 네가 고른 5개가 다 맞고, 마지막 하나가 39가 아니라 36이 나오면 어떡할 거야? 나는 답했다.

"1등 당첨금에서 2등 당첨금을 뺀 차액을 너에게 손해배상 청구할 거야."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로또 판매점은 도보 15분 거리에 있었다. 깜빡하고 현금을 두고 와서 길 건너 편의점에 가서 1300원을 주고 3만 원을 뽑아왔다. 39를 포함한 숫자 6개로 로또를 샀다.

로또를 사고 카페를 찾아 걸었다. 처음 간 카페는 하얗고 예쁜 개인 카페. 테이블 간 거리가 좋아 글을 쓰기에는 어쩐지 민망하다. 그다음에 간 카페는 어플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어쩐지 촌스러운 간판. 선거날이라서 문을 안 열었다. 그다음은 모텔골목 한가운데 프랜차이즈. 여수까지 왔는데 프랜차이즈를 가? 기각이다. 근방에는 카페가 더 없었다. 위로 더 올라가 어제도 가고 그제도 간 이순신광장 근처를 둘러보는 것과 도보로 11분 거리, 항구 근처에 있는 개인 카페 중에 선택해야 했다. 후자를 선택했다. 걷다 보니 아는 길이 나왔다. 여수살이 3일차에 아는 길. 숙소 근처였다. 돌고 돌아 숙소에서 10분 거리의 카페에 자리 잡았다. 숙소를 나선 지 1시간 10분 만이었다.

카페 간판이 타륜이었다. 항구에 위치한 카페는 배를 테마로 내부를 꾸며두었고, 2층에는 빈티지샵이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글을 썼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나는 자꾸 뭘 한다. 할 게 없어서 그런가, 싶다가도 내가 핸드폰과 태블릿 PC와 넷플릭스가 연결되는 숙소 TV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나는 하룻밤에 4만 원 조금 넘는 돈으로 빌린 이 시간이 아까운 거다. 4만 원으로 하루를 빌렸으니 내가 여수에서 보내는 하루에는 4만 원 이상의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러고 보면 4만 원을 덧대고 바라보는 세상은 새삼 참 아름답고 아깝구나. 어리석게도.




사장님이 투표를 아직 하지 못해 30분 일찍 마감한다고 했다. 나는 그보다도 10분 일찍 카페를 나섰다. 6시에 문을 닫는 카페라, 어쩐지 더 마음에 들어.


항구까지 이어지는 공원에는 소철나무가 곳곳에 자라고 있었다. 흰 구조물이 많았고, 길 끝에는 방울소리를 딸랑이는 낚시꾼들이 여럿 있었다. 산책하는 강아지들은 조용한 걸음으로 풀숲을 헤집고, 차분한 마음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중년들의 낚싯대는 바람 스칠 적마다 요란하게 운다.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눈에 보이는 단편들을 크로키했다. 일행을 기다리는 아주머니, 깨진 나무판자, 버려진 소주 뚜껑, 갈매기. 내가 종이에 펜을 대자 돌연 출발해버린 여객선.


휴대폰이 꺼져서 숙소에 돌아왔다. 첫날 사온 얼그레이맛 맥주를 마셔보았다. 떫다. 향긋하고 떫다. 실패군.

침대에 누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영화를 봤다. 1990년에 나온 프리티 우먼. 동명의 OST가 유명한 로맨스 영화. 말도 안 되게 사랑스러운 줄리아 로버츠를 응원하며 두 시간을 보냈다. 내가 에드워드였어도 비비안의 솔직함과 발랄함을 사랑했을 고, 내가 비비안이었어도 에드워드의 자상함과 눈빛에 녹아버렸을 다. 그들을 둘러싼 가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다행이다, 해피엔딩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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