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이 난 영

by Mi Won


내일은 시어머니의 90세 생일이다. 미국에서 첫애가 태어난 1987년도부터 약 10년을 시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는 해 봄, 어머니는 느닷없이 노인아파트로 이사 간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 이사 가는 목적 중엔 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도 한 몫했음을 나중에 알았다. 모든 것이 결정이 났을 때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이젠 너도 편해야지"


까탈스러운 시아버지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려고, 우리와 상의 없이 입주 지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처럼 입주 대기자가 많아 서류 접수 후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어떤 이유인지, 얼마 후 바로 입주할 수 있다는 통지를 받았고 어머니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이사 가지 말고 저희와 같이 살아요.라는 나의 말에 바로 울음을 멈추곤 평상시처럼 지내다, 다시 몇 달 후 입주 지원서를 냈다. 그것마저 바로 입주할 수 있다는 통지였다. 시무룩한 모습의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같이 지내는 이곳을 좋아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어머니 손을 꼭 잡고 "전 어머니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살 거예요. 그러니 이사 가지 마세요"라고 말씀드리고 안아 드렸다. 내심 좋아했던 그때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장남집에서 사는 걸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일 년 후 세 번째 지원서를 낼 때의 마음가짐은 예전과 달랐다. 이사 가면 다신 여기 못 온다고 반 협박을 해도, 그녀는 울지도 않았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어머닌 사내아이 셋을 키우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이사 간 후 몇 달은 주 3일, 그 후엔, 주 하루 오시길 몇 달, 나중엔 한 달에 한번 다녀갔다. 그때마다 음식 못하는 나를 위해 반찬을 바리바리 갖고 왔으며, 또 냉장고를 뒤져 반찬을 만들어 놓고 가셨다. 나를 며느리로 생각 안 하고 이쁜 막내딸을 독립시키는 엄마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서서히 어머닌 나를 독립시키고 그녀 또한 독립했다.

어머니에겐 슬픈 어린 시절이 있다. 그녀는 90년 전 유복녀로 태어났다. 그녀가 엄마의 뱃속에 있던 때, 지금의 코로나 같은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중 친척 중 한 명이 역병에 걸려 죽었는데, 아무도 시체를 돌보지 않았다. 착하고 어진 그녀의 아버지가 그를 가마니에 돌돌 말아 혼자 지게에 메고 땅에 묻어주는 과정에서, 당신도 역병에 거려 딸의 출생도 못 보고 돌아가셨다. 아빠 없이 태어난 갓난아이인 어머니는 그녀의 친할머니가 데려갔고, 젊은 어머니는 딸을 두고 외가로 가야만 했다. 앞날이 창창한 애엄마를 걱정한 두 집안 어른들의 배려로 인해 시어머니는 엄마하고도 떨어져 살아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부모님의 얼굴을 모르며, 또한 부모님의 성함도 정확하게 기억이 없는데도 그들을 그리워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지만 이번 기회에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1986년 미국 오기 위해 호적등본을 뗀 기억이 났고 당시의 서류를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빛바랜 호적등본 속에 어머니의 인적상황이 적혀 있었다. 어머니의 성명은 이난영이다. 미국에 이민 오면 보통 남편 성을 따랐기에 그녀가 이곳 미국에 정착하면서 양 씨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호적등본에 적힌 어머니의 인적상황을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었다. 우선 먹물을 진하게 묻힌 붓으로 화선지에 어머니의 이름과 부모님 이름을 내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쓰기 시작했다. 며칠 지나면 90세가 될 어머니의 이름 석자를 적는 내 손이 자꾸 흔들렸다.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을, 아직은 어설픈 글쟁이고 어설픈 캘리그래퍼지만 화선지 위에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유복녀로 태어났어도, 그녀도 귀한 자녀였고, 부모님이 애지중지했으며, 지금도 손자. 손녀에게 사랑받는 사람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의 삶이 헛되지 않았고 묵묵히 견딘 그녀의 삶을 내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었다. 어머니가 그리워했던 부모님의 이름과 어머니 이름,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를 화선지에 수없이 써야만 했다. 그녀의 외로웠을 어린 시절이 생각나 눈물이 화선지의 글씨를 흐리게 했기 때문이다. 다시 쓰기를 반복한 끝에 어머니만의 족보 같은 것을 생일 플래카드처럼 만들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장남을 먼저 보내고 힘드셨던 어머니를 그 후론 자주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작년엔 코로나로 아버님까지 돌아가셨다. 지금은 왕복 차편이 제공되는 노인센터에 주 6일 다니고 있다. 어머니와 10년같이 살면서 한 번도 다툰 일이 없을 정도로 서로에게 정을 쏟으며 살았다. 어머니는 시누이집에 살면서 손주 둘을 키웠고, 우리와 살면서 나의 아들 셋을 돌봐주셨다. 또한 둘째 아들의 자녀 두 명을 우리 집에서 봐주셨다. 이렇듯 어머니는 태어나서 시집올 때까지 남의 집에서 사셨고 미국에 온 50대부터도 자식과 손주를 위해 일생을 바친 분이다. 그녀의 삶 덕으로 지금의 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머니는 모든 자식에게 사랑만 베푸셨다.


생일 아침 나는 서툰 운전으로 어머니가 계신 아파트로 갔다. 그녀를 모시고 우선 미장원에 가는 차 안에서 고백했다. “어머니 참 잘 사셨어요 감사합니다”라고 수줍게 말씀드렸다. 운전하느라 앞을 보면서 말하자 어머니는 “얘는 별말을 다 하네 난 네가 고맙다”라며 작년에 시아버지와 좋아하는 치킨집을 가기로 했는데 못 간 게 아쉽다는 말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셨다. 기억에 없는 당신의 엄마가 참 예뻤다는 말을 그녀의 이모에게 들었다며, 이모와 그녀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셨다. 나는 어머니가 미장원에서 파마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생일 음식을 주문했다. 큰애에겐 치킨, 작은아이에겐 생선찜을 그리고 막내에겐 꽃과 케이크를 부탁했다. 나는 전날에 미리 어머니가 좋아하는 잡채와 미역국도 끓여놨고 갈비도 준비했지만, 오늘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나온 음식도 대접해 주고 싶었다.


미리 도착한 손자들의 모습과 벽에 걸린 커다란 풍선 그리고 축하 메시지까지 발견한 어머니는 아주 환하게 웃었다. 눈이 나쁜 어머니는 벽에 걸린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좋아하셨다. 생일상엔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님과 먹기로 했던 치킨을 보면서,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다며 그것을 먼저 드셨다. 아마도 아버님이 보고 싶다는 언어일 것이다. 그리곤 고맙다는 말을 계속하면서 음식을 고루 드셨다. 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어머니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벽에 걸린 종이를 읽어줬다. "너희를 키워 주신 할머니 성함은 이 난 영이다. 오래 기억해 주길 바란다"라고 말한 후 어머니의 부모님 이름을 크게 찬찬히 또박또박 읽어 드렸다. 어머니도 잘 기억 못 하는 이름을 불러주자 “맞다 맞아 우리 엄마 이름이고 우리 아빠 이름이네…” 그 모습은 꼭 어린아이 같았다.


그날 저녁, 잠을 자기 위해 겉옷을 벗는 어머니의 속옷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여름옷을 입은 것이다. 눈물을 감추려 옷장에 들어가 장롱 속의 사이즈가 넉넉한 옷들을 모두 꺼냈다. 어머니에게 따뜻한 옷을 챙기고, 수납이 모자란 어머니의 낡은 가방대신 가벼운 가방으로 교체한 후 가방 속을 정리했다. 이런 모습을 본 어머니가 “넌 뭘 날마다 이렇게 날 주냐?”면서도 내가 입어 보라 하면 다 입었다. 한바탕 옷 전쟁을 치른 후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잠이 들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친정엄마가 살아생전 나와 같이 잤을 때 좋아하던 엄마의 모습처럼 어머니의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일요일 아침, 어머니를 모셔다 드릴 시간이 되었다. 돌아가신 아버님과 맥도널드를 자주 갔었다는 말이 생각나 조금 일찍 서둘렀다. 어머니를 시누이가 다니는 교회에 모셔다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맥도널드에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메뉴를 두 세트 주문했다. 내가 커피를 다 마시자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빨리 가자며 일어났다. 차가 없는 일요일임에도 운전 못하는 내가 걱정되는지, 길을 가르쳐 주는 목소리와 표정이 어제 보다 상쾌하고 얼굴도 맑았다. 그 이유는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나에게 벽에 걸린 생일 플래카드를 갖고 가면 안 되냐고 물었다. 난 이미 그것을 어머니 드리려고 포장을 한 상태였다. 이쁘게 포장된 그것을 받자 부모님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힌 플래카드를 가슴에 살포시 품으며 집을 나선 것이다. 부모님의 유품을 안듯. 그것을 당신 집에 갖고 가서 걸고 싶다고….


어머닌 제일 좋은 생일 선물을 받았다고 정말 고맙다며 "어미야 사랑해"라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와 통화할 때면 사랑한다고 자주 표현한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도 나도 사랑해하시곤 했다. 그런데 면전에서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고 받다 보니 더 애틋했다. 그러는 사이 시누이가 다니는 교회에 도착했다. 미장원 가는 날이 되면 또 시간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는 어머니의 뒷모습 보고 있는데 발걸음이 빨랐다. 아마도 딸에게 당신 부모님의 이름을 알았다는, 그 유품 같은 것을 딸에게 자랑하고 싶은 들뜬 마음일 것이다. 오늘 밤 생일선물로 드린 따뜻한 겨울이불속에서 당신의 엄마, 아빠의 이름 적힌 종이를 보고 또 보다가, 행복하게 주무시다... 꿈속에서라도 두 분을 만나면 참 좋겠다. (2022.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