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했던 속도, 그럼에도 방향
문구만 생각해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삶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 나를 안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부터 내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라는 생각에 흔히들 가는 속도에 감흥이 없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확고하다 생각한 철없던 시절,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오만하게도, 인생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 생각했다. 반대하는 결혼조차 마음의 빈곤과 육체의 빈곤을 저울질하는 건 나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자라온 나 자신이 기품 있다 생각했지만, 결혼할 시기의 자식을 두고 보니 세상물정 모르는 헛 똑똑이라는 엄마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로 다시 돌아가 엄마가 말씀하신 것처럼 육체와 정신이 모두 풍요롭지 않는다면, 난 망설임 없이 엄마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때론 생각의 깊이가 부족해 생긴 일에도 자책보다, 현실을 파악해 혼란스러운 상황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다. 이것 또한 어쭙잖은 폼을 잡은 것이다. 예상치 못한 가중한 책임의 몫이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그때조차 물질 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었기에 비즈니스도, 좋은 지역의 집도 다 포기가 되었다. 내가 결정한 일에 대한 책임은 내 몫이기도 했고, 현실로 부닥쳐진 어려움을 부모에게나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방향이 다 옳지도 않았고, 속도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한 삶의 방향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조차 버리지 못한 자존심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흔들림을 들키고 쉽지 않았다. 혼자 극복하려 했지만 현실 속의 나는 너무 초라했고, 무지했기에 혼란 속에 빠져있었다. 남편 병원비에 시달릴 때도, 일찍 어른이 된 아이들을 마주 봐야 할 때도 나는 속도를 더 내지 않았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내가 겪은 현실은 참으로 냉혹했다. 친절하고 가까웠던 지인에게 돈을 떼이고, 마음도 떼이는 일들보다 더 큰 아픔이 나를 혼란 속에서 나올 수 있게 만들었다. 내 어깨의 무거움에 가려 생각지 못했던 아이들의 아픔을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다.
어른처럼 아이들에게도 기본적인 소셜머니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둘째 아이 때문이다. 아이들은 교회활동에 열심이었다. 큰애는 전자기타, 일반기타와 노래, 둘째는 드럼을 성가대에서 연주했으며 교회 순회경연 대회도 다닐 만큼 신앙심도 깊었다. 그러나, 허망하게 가버린 아빠의 부재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큰애는 아비가 가버린 그해 여름 대학 기숙사에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외로움과 미안함에 갇혀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반인 둘째는 예전처럼 교회활동하며 아이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 아이의 대부가 자진해서 슬픔에 빠진 둘째를 살뜰히 챙겼고 가끔 식당에 갈 때면 아이의 대부가 몰래 밥값을 계산하는 상황이 자주 생겼다. 친구들에게 그런 모습 보이기 싫다며 모임에서 빠진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때, 이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못 했다. 또한 이런 말 조차 하지 않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큰애의 아픔이 온몸으로 느껴져 고통스러웠다.
나는 고심 끝에 아이들에게 우리 집 비상금을 공식화했다. 지정된 서랍 속의 비상금을 자의로 갖고 갈 수 있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사용하라 했다. 사용하기 편한 20불짜리 500불을 늘 그 장소에 두기 시작했다. 100불짜리면 가져가기 불편할 것 같고 두둑해 보이면 몇 장씩 더 갖고 가기 편할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는 모습도 응원하지만 친구와 수다 떠는 시간도 중요하니 웅크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내 어깨의 무거움 때문에 청소년들의 일상의 즐거움과 고뇌, 그것까진 발견 못한 것이다. 술도 마실 나이고 파티도 자주 가는 나이며 차의 기름값도 필요한데도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의 허락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비상금은, 굳이 돈의 필요성을 말 안 해도 된다 알렸고 또한 아이들 차 안의 서랍에 50불짜리를 넣어 놓기도 했다. 혹시 기름이 떨어지거나 친구와 밥 먹는 자리에서 홀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겪을 미래에 대한 불안을 이런 식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어 미안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로 삶의 속도에 더 이상 의미를 두지 않았다. 늦어지는 자립은 본인들의 잘못도 사회의 잘못도 아니기 때문이다. 꽃피는 시기는 꽃마다 다르다, 싹이 늦게 올라와도, 봉오리가 늦게 아물어도 언젠가는 다 피는 것이라는 말로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 말은 나 자신에게도 하는 위로이기도 하다.
비상금을 10년 정도, 그들이 정직원이 될 때까지 챙겨 놓았다. 일주일에 한 번 집에 올 때마다 아이들은 필요한 만큼의 돈보다 적게 갖고 가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심성 곱고 생각 깊은 아이들은 그것을 갖고 갈 때마다 엄마에 대한 미안함을 갖고 있다는 것도 알기에, 아이들이 기숙사로 돌아갈 때쯤 나는 일부러 산책한다며 동네 한 바퀴를 돌곤 했다. 아무리 공표했어도 미안해할 내 앞에서 갖고 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일과 공부 그리고 사회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무리 속도를 내고 싶어도, 하루라도 아이들의 자립을 바란다 하더라도, 그 자립의 끝이 그들이 원하는 방향이길만 바랐다. 큰애와는 일곱 살, 둘째와는 여섯 살, 터울인 막내는 내가 마련한 서랍 속의 비상금을 사용한 적이 없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나에게 말했기에 잘 해결했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막내가 정규직이 될 때까지 두형이 비상금을 줬던 것이다. 막내 또한 나에게 요구하지 않는 걸 알고 형들이 챙겨준 것이다.
이제 서랍 속의 500불의 비상금은 없지만, 형제끼리 서로에게 비상금이 되어줄 사랑을 품고 있다는 건 가족의 큰 자산이고 보물이다. 아이들이 비상금을 통해 어는 정도 어려움이 해소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나름 각자의 삶을 조절하는데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을 거라 믿고 싶다. 나는 그 계기로 더 내려놓음을 알게 되었고, 이젠 나만의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노후를 위한 자기 계발에 게으르지 않은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것들은 나의 정신적인 비상금 될 것이며, 늙어가는 길목마다 위안을 줄거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아이들에게 이벤트 선물을 보낸다. 아이들이 성인 되어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문구 " From Daddy"라고 쓴다. 부모에게 받는 사랑도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며, 그 비상금도 삶의 속도를 위함이 아니고 삶의 방향에 보탬이 되기 바라는 어미 마음이었음을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