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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믹스커피 Jan 07. 2023

2023년의 셀프 신년사


 ‘2023년에 바뀌는 것들,,, 만 나이 시행’

이번 새해는 조금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뉴스에 연금제도 개편이나 세제변동과 같은 부분이 새해에 바뀌는 정책으로 나올 때면 미지근하게 넘어가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만 나이로 통일되는 이야기를 듣고는 조금 멍해졌다. 그럼 한 살 먹는 게 아닌 건가. 오, 뭔가 시간을 거저 번 느낌인걸?

 

 나는 만 나이라는 것에 그리 익숙한 편은 아니었다. 다들 '빠른 00년생이에요'라고 얘기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가라고 생각하는 편에 속했다. 대학교 입학했을 때 동기 모임이라도 가면 재수해서 들어온 사람, 삼수해서 들어온 사람, 그리고 빠른 년생. 같은 학번이라도 나이는 제각기 달라서 동기인데 나이 위의 언니라고 부르라는 사람도 있고, 그런 거 없이 그냥 동기니까 그대로 하자는 사람도 있어서 속마음으로는 뭐가 이리 복잡한가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러다가 사회에 나오면서 직급이나 직책으로 불려지거나 위아래가 정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이가 그리 큰 이슈는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20대에는 나이 드는 것이 무슨 벼슬인가라는 시니컬한 청춘이었다. 


 하지만 서른을 앞둔 스물아홉에 시니컬한 청춘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서른'이라는 나이가 주는 진정한 어른으로의 입문의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스물아홉에 죽을 결심을 했다. ' '서른의 심리학' '서른을 앞둔 당신에게' 등 나이 마케팅으로 치부될 수 있는 책이지만, 서점에 가면 그 앞에 서서 서른을 앞둔 나는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에 대한 두려움과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조바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서른 위쉬리스트'였다. 

 지금 보면 귀엽기까지 한 위쉬 리스트이다. 건강파트에서 유료의 건강검진 패키지를 받는다던가, 사랑니를 뽑는 것도 있었다. 가족력이 있기에, 결혼을 앞둔 상태에서 서로 함께 건강검진을 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펀드 투자나 재무 점검과 같은 소위말해 '서른의 어른'이면 해내야 할 것 들에 대한 리스트를 적고 하나씩 해나갈 정도로 '서른'에 유난이었다. 서른을 넘겨서 결혼하기 싫어서 결혼식 날짜도 11월로 막바지에 결혼식장 있는 곳으로 바로 잡았고, 서른의 위쉬리스트 10가지를 서른 안에 하나씩 채워나갔다.


 그렇게 맞이한 서른 하나. 별다를 것이 없는 오늘이었다. 작년의 그 유난히 머쓱할 정도로 너무나 똑같은 일상들이었고 하루였다. 넘기 전에는 너무나 높아 보였던 산이 오르고 보니 그리 큰 경관이 있지도 않고, 다시 올라야 할 다음 산으로 가는 길이 보이는 느낌이랄까. 그 뒤로는 아이를 낳고, 일을 하고 ,  또 아이를 낳고의 반복으로 이제 아이의 나이는 개월로도 얘기할 수 있는데, 내 나이는 아이를 낳을 때쯤인 32살의 기억에 멈추었다. 그래서 누가 나이를 물으면 32에서 아이나이를 더해서 계산해서 이야기를 하곤 했다. 


 벌써 아이는 첫째 아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코로나 베이비로 태어난 둘째 아이도 유치원에 입소하게 될 정도로 시간이 지난다. 코로나 베이비로 태어나서 본의 아니게 가정보육을 하고 있었다. 작년에 4살이 되고 위드코로나로 접어들게 되면서 어린이집을 보내게 되었는데, 첫째와 둘째가 기관을 다니게 되니 몇 년 만에 온전한 내 시간을 반쪽으로라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내 나이는 마흔을 앞두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마흔에 대한 준비가 이렇게 성큼 다가왔을 줄이야. 하지만 서른에 초조해하던 젊은 청춘은 그사이에 많이 자라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힘이 생겨서 조금은 설레며 마흔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작년에는 해보고 싶었던 많은 시작을 해보았던 것 같다. 남편과 함께 노후에 함께 할 수 있는 스포츠로 골프를 같이 배우기 시작했고, 회사를 그만두고 작게나마 이어오던 나만의 일을 조금씩 넓혀가며 도전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국이어서 오히려 오프라인의 물리적인 제약이 있는 나에게는, 온라인이 새로운 기회가 되었고, 덕분에 좋은 인연들과 기회들로 조금씩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한편에 있던 위쉬 리스트인 쓰는 엄마로 글쓰기를 시작하는 동료들과 문집도 만들었다. 나와 같이 어린이집에 아이가 간 시간 동안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엄마들의 성장 루틴인 미타임(Metime)을 같이 가지는 시간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런 시도 속에 좌절도 있고 쪽팔림도 있었다. 겸손이라는 벽에 숨어 나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의 필요성을 못 느끼다가 누군가에게는 그런 두리뭉실한 나의 모습이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게 되었다는 자책감으로 좌절도 있었다. 그리고 시작을 외쳐놓고 그것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해서 나 스스로의 빈 일기장을 볼 때의 쪽팔림도 있었다. 그렇게 버무려진 작년 2022년 시작과 도전의 반복의 해였던 것 같다.


 그렇게 마흔을 앞두고 하고 싶은 게 많던 서른여덟의 나는 이제 2023년 1월에는 다시 서른여덟이다. 아직은 6달이나 더 서른 여덟로 살 수 있다. 시작만 하고 끝을 내지 못한 것 같은 연말의 조급함이 조금은 미뤄진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2023년의 새해를 시작할 때에는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싶어졌다. 아니, 용기를 내야 한다.  나로서 도전하는 용기. 그리고 누군가의 시작을 응원해줄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런 시작을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는 용기. 나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용기. 그런 용기들을 2023년에는 채워보고 싶다. 

 한 살 더 먹는 것이 늦춰진 것 같은, 거저 얻은 시간과도 같은 2023이라서 올해는 용기가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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