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면

겁쟁이가 된다.

by 정여사


한 달 전쯤, 크레스티드 게코, 대충 줄여서 도마뱀을 분양받아 왔다.


언젠가는 도마뱀을 키워보고 싶었는데, 집 근처에 매장이 생겼길래 호기심에 들렀다가 그만...


수많은 아이들 중 꼬리가 없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딸아이는 그 도마뱀이 불쌍해 보여서 더 마음이 가는 모양이다.


이것도 인연이다 싶어서 그 아이를 집에 데려와 보니 아뿔싸... 밥을 잘 안 먹는다. 우리 집에 오는 녀석들은 왜 이렇게 밥을 잘 안 먹는지 모르겠다. 딸, 소라게. 그리고 도마뱀까지. 이 정도쯤 되면 내가 편식쟁이 자석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특히 소라게 녀석은 대체 뭘 먹고 지금까지 살아있는지 의문이다. 밥이 안 줄어드는데...? 흙 파먹고 사는 건가? 탈피 껍질을 먹고 산다손 쳐도, 탈피를 하지 않는 기간도 있는데 어째서 살아있는 것인가... 먹지도 않은 (듯한) 밥그릇을 치우며 늘 생명의 미스터리와 조우한다.


소라게 꼴은 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밥을 먹이려 실랑이를 벌이다 도마뱀에게 물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뚜껑을 열자마자 호다닥 탈출을 해버린 녀석을 겨우겨우 검거한 뒤, 피딩을 포기하기로 했다.


삶의 의지가 있다면 알아서 주워 먹겠지 싶어 집 안에 밥그릇을 넣어두었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드디어 밥그릇이 비기 시작했다. 이걸로 밥 문제는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이제 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한 번 탈출을 경험하고 나자 이제 내가 케이지 열기가 무서운 것이다.


심호흡을 하고 도마뱀의 눈치를 보며 케이지의 잠금장치를 잡는다. 그 안에 있는 도마뱀 또한 저 인간이 또 나를 잡을 까 불안과 경계로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달칵, 케이지를 여는 소리에 도마뱀이 움찔하며 오줌을 싼다. 어떨 땐 똥까지 싼다. 몸을 최대한 가볍게 해서 탈출을 도모하기 위함이라 하더라.


나는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 움츠린 도마뱀의 몸을 본 뒤 녀석이 튀어나갈 법한 방향을 가늠하며 탈출한 녀석을 잡는 상황을 시뮬레이션한다. 그리고는 겁에 질려 다시 케이지를 닫아 버린다. 나나, 도마뱀이나 둘 다 겁에 잔뜩 질려 경계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매장에 조언을 구하러 가니, 우리 집 도마뱀 성격이 원래 겁이 많다고 하시더라. 그냥 성격이니 어쩔 수 없다나.


꼬리를 잘라내야 했던 사건이 무엇인진 알 수 없으나, 타고나길 겁이 많은 성격으로 타고난 녀석이라 어차피 꼬리는 잘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에 오기 전에 잘렸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겁이란, 불안에서 오는 감정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


도마뱀은 내가 저를 해할 까봐, 나는 이 녀석이 또 탈출할까 봐. 둘 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그런 일이 생길까 불안해하며 괴로워하는 중이다.


도망가면 잡으면 된다. 쉬하고 똥 싸면 치우면 된다.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해답이 나오는데, 불안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인 걸.


우리 두 겁쟁이가 불안을 떨쳐내고 덤덤하게 살아갈 날은 언제일까. 오늘 집 청소 해줘야 하는데 벌써부터 겁나네.... 휴우.

탈주각을 재는 듯한 저 눈...

keyword
이전 18화카드왕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