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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이 죽도록 싫었다. 비가 오면 약속까지 취소했을 정도다. 습기 때문에 눅눅해진 바닥이 싫었고 눅눅한 이불을 덮는건 더 싫었다. 빨래가 안 마르는 것도 싫었다. 빨래에서 냄새가 난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장마 기간에는 그냥 죽고 싶었다. 가장 싫었던 건 긴 바지를 입으면 종아리 부근까지 물방울 모양대로 자국이 새겨진다는 것이다. 흙탕물이 아닌데도 그랬다. 옷 다입고 신발까지 신었다가 옷의 주름이 눈에 띄면 다시 들어와 다림질을 하고 나가는 나에게 이런 흔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옷이 망가지는 게 너무 싫어서 비오는 날에는 되도록 외출하지 않았다. 부득이하게 외출해야한다면 긴바지를 입지 않았다. 기술이 발전하고 제습기와 건조기를 구매하자 몇 가지의 고민은 해결되었다. 제습기를 틀어놓으면 보송보송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었고 건조기를 돌리면 비가 쏟아지더라도 바삭하게 잘 마른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비오는 날을 사랑하게 된 건 오로지 그 애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애가 장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걔가 딱히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한 것도 아닌데 이름의 뜻을 알게된 순간부터 비오는 날을 억지로라고 사랑해야한다고 생각했다.내가 좋아하는 애가 장마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장마를 싫어할 수는 없었다. 무조건 좋아해야 했다. 비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했다. 장점을 생각해 봤다. 수분이 적은 과채를 착즙하듯 몇 개 없는 장점을 쥐어짜냈다. 가뭄이 해결되고 농작물이 풍요로워지고 미세먼지가 씻기고….그런거 말고 직접적인 거. 새벽 빗소리, 영화 보기 좋은 분위기….단 한번도 비오는 게 분위기 있다고 생각한적 없으나 그 때부터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비를 사랑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비가 오면 그 애가 떠올라서 비 때문이 아니라 걔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몇 번 웃다보니까 비오는 날이 싫지 않아졌다. 고등학생 때는 비오는 데 우산이 없으면 집도 안가고 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아니면 우산 가지고 데리러오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냥 맞는다.
지금은 걔한테 관심 없는데 아직도 비가 오면 그 애 생각이 난다. 그리고 그 애를 좋아했던 그 시기가 떠오른다. 그 때의 마음이. 긴장감. 행복감 같은 것들. 그 모든건 오롯이 내 거니까. 너는 몰라도 나는 기억하니까.
장마철이 코앞이다. 나는 이제 장마가 예전처럼 싫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