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책들의 역사

100개글쓰기

by 미수

고등학생 시기를 따로 쓰는 건 이 시기에 비교적 책을 많이 읽었고, 기록도 있어 자세히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전에도 간간히 책은 읽었지만 맹목적으로 읽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맹목적으로 읽었다. 열심히 살겠다는 이유나 생기부를 채우겠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랬으면 소설만 잔뜩 읽지도 않았을 거다. 반 친구들이랑 너무 안 맞았다. 그 속에서 웃기지도 않은데 웃고 있는 내가 너무 가식적이고 그 시간을 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자리로 가 앉은 뒤 책 속으로 도피했다. 책 속에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해 볼 수 없는 다양한 세계가 있었다. 이때부터 인터넷에 짧게 독후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밑줄을 그을 수 없어 삼키고 싶은 문장은 사진을 찍어두었고 그걸 짧은 소감과 함께 정리해 두었다. 좋았던 책은 긴 소감을 덧붙였지만 그저 그랬던 책은 사진만 첨부되어 있고 텅 빈 게시글도 있다. 이 시기에는 한국 문학을 잘 안 읽었다. 교과서에서 맨날 접하는 한국 문학이 아내를 때리고, 방치하는 그런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친구의 sns에서 <반짝반짝 빛나는>을 본 뒤 따라 읽고는 반했다. 그 뒤로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많이 읽었다. 동네 도서관은 한 번에 일곱 권 까지 대출할 수 있었는데 그중 한 두 권은 꼭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빌렸다. 특유의 나른하고 담담한 문체가 좋았다. 단편집 <차가운 밤에>도 좋아했다. 그의 모든 작품을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좋아했다.



<밤의 피크닉>과 <여섯 잔의 칵테일>도 좋아했다. 그 당시에는 이런 감성의 글을 좋아했다. 마음이 따듯해지는 동화 같은 소설들. 친구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결의 소설로 <한밤중의 베이커리>도 좋아했다. 이때 독후감에 위저드 베이커리를 언급하며 ‘베이커리’가 들어가는 제목의 책은 다 재밌는 거냐고 써놓았다. 아무튼 이 책 때문에 크로와상을 좋아하게 됐다. 빵은 부드럽고 단 게 최고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크로와상의 묘사에 군침이 돌았고 대체 어떤 빵이길래 히로키가 집착하는지 궁금했다. 그러고 사 먹으니까 웬걸, 입안에 퍼지는 고소한 버터의 풍미와 바삭한 식감이 너무 황홀했다. 히로키가 집착할 만했다. 아무튼 그 뒤로 나는 크로와상을 사랑하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을 스스로 ‘히로키 효과’라고 불렀다. 책으로 인해하게 되었는데 의외로 너무 좋았던 것들.



그리고 전혀 다른 결의 기담, 살인, 호러 같은 책들도 좋아했다. 당시에 추리 소설도 많이 읽었지만 <대프니 듀 모리에>처럼 소름 끼치면서 사랑한 작품이 없었다. 완독 한 뒤 책을 덮었을 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토록 짜릿한 책이라니. 주위 사람에게 열렬히 추천하고 다녔으나 무섭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도쿄 기담집>과 <경성기담>도 좋아했다. 전자는 소설이지만 후자는 아니다. 경성에서 일어났던 기괴하고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나온다. 한국사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때 독립운동을 하다 변절한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 가령 민족 대표 33인 중 하나였던 박희도는 젊어서 독립운동으로 옥살이를 하고 해방 후엔 친일 죄로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유관순 열사의 스승이기도 했던 박인덕 또한 여성교육에 힘쓰고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후에 변절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여러 이야기 속에서 가장 마음이 갔던 건 조선 최초의 여성 경제학자 최영숙 선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5개 국어에 능했으나 너무나 시대를 앞서간 나머지 그만한 대우를 못 받고 끝내 영양실조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다. 그에 관한 서적이 별로 없어서 아쉽다. 얼마 전에 한 권 구매했으나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른 기묘한 책으로는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을 좋아했다. 제목처럼 내용도 기묘하다…. 미국의 작은 마을인 파인 코브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은 뒤 너무 좋아 구매하려고 했으나 이미 절판된 후였다.



이 시기에 좋아했던 몇 안 되는 한국 문학 중 하나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이다. 배경이 학생운동할 때니까 우리 엄마가 성인이 되기도 전의 시대인데 그 배경에 왜 그렇게 애정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우리 오늘을 잊지 말자, 라는 문장을 오래도록 좋아했다. 좋은 일이 생긴 날이면 일기에 ‘오늘을 잊지 말자’라고 썼다. 그러고는 혼자 윤과 명서를 떠올리며 조금 웃었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표절 논란 때문에 좋아한다고 말을 못 하겠다. <디저트 월드>는 인스타에서 보고 읽은 책이다. 몇 가지의 디저트에 관한 피카레스크식 소설이다. 여기서 나오는 몽블랑이 너무 먹어보고 싶어서 찾아다녔으나 프랑스식 몽블랑을 파는 곳은 흔치 않았다. 아직까지 못 먹어 봤다. 덕분에 한국에는 몽블랑이라는 빵이 두 종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프랑스식 밤 크림을 올린 몽블랑. 다른 하나는 데니쉬 종류의 몽블랑. 한국 빵집에서는 주로 후자의 몽블랑을 만나 볼 수 있다. 이 후로 한국 현대 문학을 조금씩 찾아 읽었다. 그래서 사랑하게 된 단편집으로는 <중국식 룰렛>, <지극히 내성적인>이 있다.



마지막으로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보고 전문을 찾아 읽을 만큼 좋아한 한국 문학들. <줄>과 <감자 먹는 사람들>, <나목>. 나목은 문제집에서 보고 전문을 읽으려고 그 페이지 사진까지 찍어 두었다. 제목을 잊어버릴까 봐. 다들 그렇듯 <젊은 느티나무>의 그에게선 비누 냄새가 났다는 문장도 좋아했다. 또 다들 그렇듯 <이런 시>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좋아했는데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를 유난히 좋아했다. 시에 관한 과제를 하는 수행평가가 있었는데 꼭 최영미 시인의 시로 하고 싶어서 그의 시집을 많이 찾아 읽었다. 결국 <꿈의 페달을 밟고>라는 시로 과제를 했다. 그 과제가 뭐였는지는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그 시만은 기억하고 있다.



크고 작게 나에게 영향을 끼쳤을 작품들을 되새겨보니 사람 취향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호러 및 스릴러를 여전히 좋아하고 SF를 읽을 때 심장이 뛰는 걸 느낀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 문학을 거의 읽지 않고 한국 문학을 자주 읽게 되었다. 가끔 책을 읽고 나면 그때 문학 시간처럼 누군가가 해설을 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고등학교 생활이 그리운 건 아닌데 그 과목은 조금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01. 내가 좋아했던 책들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