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상/시/대/기

백수일기 04

by 미지

일명 집순이, 가능하면 최대한 오랜 시간 집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나에게 누군가 왜 그렇게 집을 좋아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오래전 일이다. 속으로 왜 이렇게 당연한 걸 묻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서울 땅값이 얼마인데 내가 내는 월세를 생각하면 하루라도 집에 더 있어야 남는 거라고 답했었다. 대한민국이 MBTI의 나라가 된 후로는 그냥 "I라서요"라고 답하고 있다.


사실 월세 때문에 집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집 밖에 나가는 순간부터 약정이 끝난 스마트폰 배터리처럼 순식간에 닳아버리는 내 체력 때문에 집에 갈 수밖에 없다. 불가항력에 가깝다. 방전 상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혼자 가만히 묵언수행을 하는 것뿐이다.


회사를 다닐 때는 의식적으로 약속을 잡지 않는 기간을 만들곤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완벽하게 충전한 상태로 퇴근한 직장인을 만나러 갈 수 있다. 주말 내내 친구들을 만나도 월요일에 쉴 수 있다. 이럴 때 사람을 많이 만나두기로 다짐한다.


백수 이틀 차의 아침이 밝았다. 예전 회사 친구와 카레를 먹기로 한 날이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연 순간, 뜨겁게 밀려오는 바람에서 여름을 느꼈다.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양산을 펼쳤다. 만 원을 주고 산 양산은 어딘가 허술해서 여러 번 접었다 펼쳐야 고정이 되곤 했다. 그냥 새로 하나 살까 고민하면서 유튜브 뮤직에서 빠른 선곡에 있는 곡을 하나 터치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고, 흘러나오는 음악은 아름다웠다. 모든 게 즐거웠다. 연차를 쓰지 않으면 평일 낮에 놀 수 없었던 직장인 시절은 벌써 다 잊었다. 자유다.


목적지는 성북동의 '카레'. 가게 이름이 카레다. 파는 메뉴도 카레다. 아주 예전에 한 번 간 적이 있는데, 다시 가보고 싶었지만 갈 기회가 없었다.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에 영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디어 갈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가게 앞에 도착한 순간, 무언가 이상했다. 가게 앞 화단에 손님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었다. 아, 여기 맛집이었지. 양산을 쓴 채 화단에 앉아 입장을 기다리는 한 무더기의 손님들을 보고 바로 메뉴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카레는 또 실패다.


재빠르게 버스를 환승해 성북동 위쪽으로 올라갔다. 카레 대신 선택한 건 예전부터 종종 방문했던 누룽지 백숙 가게다. 심심하고 고소한 메밀전, 부드러운 닭백숙과 쫀득한 누룽지 죽. 배를 채우며 계속 수다를 떨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설정값이 전혀 다른 캐릭터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 귀여운 걸 보면 '살까?' 생각하는 나와 달리 손으로 뚝딱 만들 수 있는 손재주가 좋은 사람. 다재다능하고 실행력이 좋은 그녀는 얼마 전 이야기했던 글쓰기 수업을 체험했다고 말했다.


백수의 다짐 같은 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지만, 말로 뱉고 나면 구속력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백수가 된 심경과 다짐을 한참 떠들었다. 후식으로 고른 망고 케이크 한 조각이 사라지는 동안 이야기의 주제는 일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집으로, 집에서 AI로 끊임없이 바뀌었다. 에이닷이 우리의 대화를 들었다면 '백수가 된 상황에서의 신변잡기' 정도로 요약했을 것이다.


커피의 얼음이 거의 다 녹았을 때쯤 교보문고로 향했다. 신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문구를 구경했다. 한 매대에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라는 책의 편집자 코멘터리 북이 놓여 있었다. '난가?', '감동ㅠ' 내가 쓴 것 같은 코멘트를 보며 웃다가 책의 한 페이지에서 흥미로운 코멘트를 발견했다. '이 정도면, 사랑에 관한 너무 많은 비밀을 누설하는 책 아닌가.' 책이 궁금해졌다. 그 페이지에는 1/3 가량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제 그는 사랑에 관한 돌이킬 수 없는 비밀을 발견했다. 가장 완벽한 사랑에서조차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덜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똑같이 착하고 똑같이 재능 있고 똑같이 아름다운 두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서로를 똑같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세상에 없다.

손턴 와일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중에서


친구가 추천한 책 몇 권과 이 책의 이름을 메모 앱에 기록했다. 조만간 사랑에 관한 많은 비밀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남은 할 일은 소금빵을 사는 것. 소금빵을 사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하나를 나눠 먹었다. 손에 묻은 버터 기름을 닦으면서도 계속 수다를 떨고 웃었다.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오늘 새롭게 발견한 것을 떠올렸다. 그녀가 체험한 글쓰기 수업부터 교보문고에서 본 흥미로운 신간과 코멘터리 북, 누군가의 삶과 취향, 가치관의 조각. 역시 한 명의 사람은 하나의 세계다. 타인과 교류하는 만큼 세계의 일부를 더 많이 알게 된다.


가진 게 시간뿐이라면, 시간과 무엇을 맞바꿀 것인가 고민해 본다. 아무래도 나와 세상을 아는 일 아닐까. 그렇다면 백수의 시간 동안 더 즐겁게, 더 많이 탐험해야겠다.


아무래도 다음 주에는 친구들에게 연락을 보내야겠다.

백/水☆상ㅅ1ㄷㅐㄱ1♡부➔르면ㄴrㄱㅏ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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