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03
한 달 남짓 다닌 회사를 퇴사하던 날,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비가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를 ASMR 삼아 마지막 업무를 해치우고 있는데, 팀원이 슬쩍 말을 걸더니 봉투 하나를 건넸다. 퇴근 후에 읽으라는 당부와 함께. 치울 것도 없는 썰렁한 책상 위에 그녀가 준 갈색 편지 봉투를 올려둔 채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마지막 퇴근 20분 전, 업무를 끝내고 메신저로 몇 분께 인사를 드린 뒤 장비까지 모두 반납했다. 한 달 만에 무언가를 관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전 직장을 퇴사하던 날에는 마지막까지 인수인계를 했다. 인사할 사람이 너무 많아 메신저와 메일을 보내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었다. 이번에는 민망할 정도로 고요한 퇴사였다. 한 달 동안 같이 일한 팀원이 준 편지 한 통과 회사에서 신던 슬리퍼만 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건물을 나섰다.
지하철에서 편지 봉투를 열고, 반으로 곱게 접힌 편지를 펼쳤다. 분명한 편지였다. 그러니까 카드가 아니라 편지였다. 고작 한 달 동안 함께 일하고 밥을 먹었을 뿐인데 황송하고 다정한 이야기가 가득했다. 어떤 책의 구절을 인용하며, 우리가 이 회사에서 만난 것도 가르쳐 주어야 할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응원과 행운을 빌어주는 건 덤이었다.
편지를 읽다가 잊고 있던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정여울 작가의 <똑똑>. 책에서 가장 사랑했던 문장의 한 부분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더 좋은 우연의 세렌디피티'라는 말이었다.
어떻게 기다릴 것인가. 지금 내가 그걸 할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 되겠구나,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무언가를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기다려야겠구나. 누구에게나 하고 싶지만 아직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잖아요. 무겁지만 그 무거움을 감당하면서, 항상 연습하면서 적극적으로 기다려요. 더 좋은 만남이 올 때까지, 더 좋은 우연의 세렌디피티가 일어날 때까지.
- 정여울, <똑똑> 중에서
비록 이직은 실패했지만, 쉽게 사귀기 어려운 동료를 만난 건 좋은 우연의 세렌디피티일 것이다. 그녀의 편지 한 통 덕분에 한동안 잊고 지내던 책을 펼쳤고, 사랑했던 문장을 다시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백수 생활에 등대가 되어줄 이야기를 다시 만나 반가웠다.
백수가 된 첫날, 느지막이 일어나 방을 치우고 책상에 앉아 펜을 들었다. 편지와 책 속의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고 난 뒤 답장을 써 내려갔다. 그녀를 만난 것도,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도 더 좋은 우연의 세렌디피티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