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08
오랜만에 대학교 시절 모임 친구들을 만났다.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친구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간 있었던 일을 떠들다 보면 금세 시간이 흐른다. 홀쭉했던 한 친구의 배는 출산을 앞두고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
몇 년 전 진로를 바꾼 용감한 친구, 출산 휴가를 앞둔 애국 직장인, 직장에서의 독립을 고민하는 시니어 직장인, 잘 나가는 프리랜서. 이 가운데 나만 백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주변에 백수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락처 속 수많은 사람 중 오직 나만 백수다. 오직 나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바쁘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틈에서 멈춰 서 있는 백수. 모두가 정해진 자리에서 각자의 할 일을 하는 동안 제자리 걸음을 하는 나. 문득 이게 맞나 싶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 무모한 백수는 갑자기 세상이 조금 두려워졌다.
20대에도 백수였던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취업준비생'. 그때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면접 스터디도 하고 인적성 공부도 했으니 지금과 같은 순도 100% 백수는 아니었다. 그 시절,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 너무 불안했다. 모두가 진짜 땅 위를 걸어다니는데 나만 홀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가짜 땅 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실체 없는 공포심 때문에 가지 말아야 할 회사에 입사하는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백수가 되면 살아가는 감각이 빠르게 무뎌진다. 방 안에 혼자 가만히 있으면 세상의 움직임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시간도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출근해서 종일 시달리다가 퇴근하던 직장인 시절에 비하면 하루가 무척 느리게 흐르지만, 그러다 금세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버린다. 평일도 주말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시간을 자각하는 순간 공포를 느끼게 된다.
집으로 돌아와 채용 공고를 한참 읽으면서 무직 생활의 끝을 헤아려 본다. 아무도 묻지 않아 말한 적 없는 내 좌우명─밥값을 하자─을 언제쯤 다시 실천할 수 있을까.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는 폭주족의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아주 느리게 쌓아가고 있는 이 시간을 자각한다. 밀려오는 걱정을 뒤로 하고 이번 백수 생활을 보내는 동안 절대 불안과 싸우다 조급함에 빠지지 않기로 다짐한다. 가짜 희망에 속거나 공포와 우울로 하루를 망치지도 않을 것이다.
청년 백수가 그렇게 많다는데 백수가 단 한 명뿐인 나의 세계. 캐릭터의 역할은 탈출구 찾기. 나만 백수인 세계관에서 무엇을 깨닫게 될 지 모를 일이지만, 나의 존재를 잊지 않고 살아내야 한다는 건 명확하다.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 속에도 항상 방향과 배움이 있는 법이다. 쫄지 말자. 어차피 지금 갈 수 있는 곳은 내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