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적, 낮잠

백수일기 07

by 미지

백수 5일 차, 별다를 것 없이 늦은 아침을 맞이했다. 창문으로 햇빛이 가득 쏟아질 때쯤 일어나는 생활이 벌써 익숙하다. 해가 쨍쨍한 시간에 일어나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한 끼를 먹는다.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비닐팩에 든 스팸을 구웠다. 너무 양심이 없는 것 같아 냄비에 물을 올리고 냉동 브로콜리를 한 줌 꺼내 데쳤다. 스팸을 구운 탓에 방에서는 짭조름한 기름 냄새가 났다. 창문을 활짝 열고 인센스 스틱에 불을 붙였다. 방 안에 퍼지는 절간 냄새와 주방세제의 오렌지향을 맡으며 그릇을 박박 닦았다.


오후 두 시, 피아노를 치러 집을 나섰다. 백수가 된 후 처음 레슨을 받으러 가는 길이다. 백수가 되고 나서 며칠 동안 바짝 연습을 한 덕분인지 한 시간 내내 선생님의 칭찬이 쏟아졌다. 나 좋자고 하는 취미 생활인데 다 큰 어른이 돼서 이런 칭찬을 받다니! 선물을 받은 어린이처럼 기뻤다. 지난해에 처음 쇼팽 왈츠를 배울 때 도무지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연주를 하는 스스로에게 조금 슬펐는데, 올해 새 왈츠를 배우면서 이 곡을 가르친 수강생 중에 제일 잘 쳤다는 말을 들었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일 년 동안 피아노를 친 몇 백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함박웃음이 나왔다.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와 잠시 침대에 누웠다. 잠깐 유튜브를 보고 있었는데 유달리 이불이 너무 포근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밖이 어두웠다. 핸드폰 잠금화면을 터치해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여덟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선명한 숫자가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밤에 잠을 못 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갑자기 뇌가 멈춘 것처럼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계획은 분명 이런 게 아니었는데, 순식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30분도 아니고 3시간이 넘는 낮잠. 잘 쉬고도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정신은 멍하고, 무언가 하고 싶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정신머리도, 의욕도 모두 다 꿈나라에 두고 온 모양이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밤산책을 나갔다가 불닭볶음면과 타코야키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얼얼한 입에 나랑드 사이다를 때려 붓는다. 혈당 스파이크로 잠이 쏟아질 만한 조합인데도 낮잠을 오래 잔 탓에 정신이 또렷하다. 책상 앞에 앉아 채용 공고를 찾아본 뒤 롱블랙 한 편을 읽었다. 브런치도 쓰고 음악 감상도 하고 잔뜩 딴짓을 했지만 새벽 세 시가 넘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도 소용이 없다. 금요일 밤 10시의 직장인처럼 몸도 정신도 쌩쌩하다. 망했다. 내일 험난한 시차 적응이 예상된다. 오전 루틴은 꿈에서나 해야 할 것 같다.


다시는 낮잠을 자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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