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보며 엉엉 우는 날

백수일기 10

by 미지

백수가 된 김에 몰입해서 영화와 드라마를 보겠다고 다짐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여전히 넷플릭스 메인화면만 하염없이 스크롤한다. 직장인 시절과 다른 게 없다. 시간이 없을 때 분명 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이상한 일이다. 이왕 볼 거라면 가장 재밌는 걸 보고 싶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보지 않는 기묘한 미루기에 빠졌다.


2화까지 겨우 본 '스트리트우먼파이터'도 왠지 재밌지 않고, 이미 여러 번 본 영화를 틀자 집중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면서 익숙한 대사가 배경 음악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미지의 서울'을 보라는 친구의 말을 떠올렸다. 내 브런치 작가명과 같은 이름에 괜히 정이 간다. 사실 나의 '미지'는 미니멀 지망생의 줄임말이라 별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첫 페이지부터 우리는 함께였다"

드라마는 일란성쌍둥이 미래와 미지의 유년 시절을 소개하는 미지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똑같은 얼굴과 달리 알맹이는 점점 달라지는 둘. 성격도 취향도,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다. 전교 1등 미래, 전교에서 1등으로 밥 먹는 미지. 뻔한 전개가 예상됐지만, 정장을 입은 미래와 노란 머리 미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자세를 고쳐 앉아 본격적으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미래

병을 가지고 태어난 미래. 고시에는 실패했지만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공기업에 입사했는데, 직장 내 괴롭힘을 견디며 겨우 버티고 있다.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와 정장을 입은 모습 위로 아무런 표정 없는 미래의 얼굴이 보인다. 직업만으로도 자식 농사 성공했다는 말을 듣게 하는 효녀지만 정작 당사자의 삶에는 희망도 없는 고통만 가득하다.


미지

병약한 언니와 달리 튼튼하게 태어난 미지. 점심시간에 전교에서 1등으로 달려 나가 밥 먹는 미지를 본 선생님의 권유로 달리기를 시작해 유망주가 됐지만, 부상을 당하고 만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라고 외치며 방을 나서는 미지의 목적지는 청소 일을 하는 학교다. 엄마와 둘이 살며 할머니를 간병하며 일용직을 전전하는 동안 언니와 비교도 많이 당한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서울에 있는 쌍둥이 언니에게 반찬을 주러 간 미지는 어딘가 이상한 미래를 마주한다. 미래는 적당한 높이에서 떨어지면 남에게 피해도 끼치지 않고 회사도 그만둘 수 있지 않겠냐고 랩을 하듯 미지에게 말한다. 그리고 미지가 화장실에 간 사이 핸드폰까지 그대로 남겨둔 채 사라진다. 미지는 이상했던 미래의 표정과 말을 떠올리며 달리기 시작한다.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미래의 손을 낚아챈 미지는 결국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다.


병원에서 미래의 직장 내 괴롭힘 사실을 알게 된 미지. 회사 대출 때문에 쉽게 퇴사하지도 못하는 미래가 답답하기만 하다. 결국 미지는 어릴 때처럼 서로의 삶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똑 닮은 얼굴로 몰래 서로의 일을 대신해주던 옛날처럼. "내가 너로 살게. 너는 나로 살아"


미지의서울.png


1화를 보는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눈물이 줄줄 났다. 사람들은 살아보지 못한 타인의 삶을 쉽게 부러워하고, 경멸한다. 안정되어 보이지만 사실은 벼랑 끝에 선 미래의 상황도, 사회적 백수로 매번 언니와 비교당하며 은근히 차별당하는 미지의 삶도 모두 공감이 돼 서글펐다. 드라마를 한 편씩 더 볼 수록 내 안의 미지와 미래를 모두 발견하게 됐다. 고작 한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삶이 있을 리 없다.


드라마 속 인물들의 입에서 명대사가 쏟아질 때마다 같이 엉엉 울었다. 타인으로 살며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을 돌아보며 비로소 "남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의 가장 큰 천적은 나라는 걸" 깨달은 미지의 말에도, 세상에서 자신을 고립시킨 미지에게 할머니가 건넨 말에도 눈물이 났다. "사슴이 사자 피해 도망치면 쓰레기야? 소라게가 잡아 먹힐까 봐 숨으면 겁쟁이야? 다 살려고 싸우는 거잖아. 미지도 살려고 숨은 거야. 암만 모양 빠지고 추잡해 보여도 살려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


미지의 서울에서 홀로 백수가 된 지금, 이 드라마를 통해 타인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나를 돌아보게 됐다. 초라한 나를 마주할 때마다, 모양 빠지게 도망칠 때마다, 백수 생활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 들 때마다 이 드라마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드라마를 보며 엉엉 울고 얼굴을 박박 씻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미지(未知): 아직 알지 못함.

아직도 삶의 궤적을 정확히 그리지 못하는 서른이 넘은 어설픈 백수. 모르는 게 많아 오지 않은 미래가 두렵고 선명해 보이는 타인의 삶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남이 나를 모르듯 나도 남을 모른다. 각자의 삶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기준 없는 잡음에서 벗어나 때로는 너그럽게 나에게만 집중해야겠다. 끝난 어제는 잊고, 먼 내일 대신 시작된 미지의 오늘을 잘 살아가자!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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