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하나를 먹는 마음

백수일기 11

by 미지

백수가 되면 다시 요리에 재미가 생길 줄 알았다. 건강한 식재료로 하루 두 끼 정도는 직접 차려 먹고, 느긋하게 제철 과일도 곁들이는 그런 삶을 상상했다.


현실은….


어영부영 일어나 하루가 시작되면 간장계란밥이나 인스턴트, 굴러다니는 과자와 빵으로 대충 한 끼를 먹는다. 어떤 날에는 배달의 민족을 넷플릭스 보듯 감상하다 주문 목록 속 익숙한 가게에서 습관처럼 밥을 시킨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주문이 '조리 시작' 상태로 바뀌면 다짐한다. 내일부터는 꼭 제대로 해 먹어야지. 그리고 또 똑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희망찬 다짐과 함께 산 채소가 며칠 째 냉장고 속에 있다. 누군가 열심히 재배해 내 냉장고 안으로 들어왔을 가지와 파프리카, 오이, 애호박. 이대로 썩게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귀찮음이 온몸을 지배한다. 날씨도 더운데 불 앞에 서 있기도 싫고, 설거지도 미루고 싶다. 가지야,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는 배달의 민족인가 봐.


식사를 미루며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다 보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더는 미룰 수 없다. 내 밥도, 냉장고 털기도. 요리만큼 귀찮은 게 음식물 쓰레기 처리라는 걸 떠올리며, 냉장고에서 가지를 꺼냈다. 냉장고에서 물러 터진 가지를 처리하는 건 설거지보다 끔찍할 것 같다.


레시피도 없이 대충 가지와 양파를 썰고 올리브유를 두른 팬에 구웠다. 간장과 맛술, 다진 마늘, 올리고당을 대충 섞어 양념을 만들고 노릇하게 익은 가지 위로 뿌렸다. 밥 위로 양파와 가지를 올리고 노른자 하나를 예쁘게 올려준다. 단출한 가지 덮밥이지만 나쁘지 않다.


가지덮밥.jpg


노른자를 톡 터뜨린 뒤 잘 익은 가지와 밥, 노른자를 크게 떠 입 안 가득 넣으니 꽤 괜찮은 맛이 났다. 막상 하면 별 것도 아닌데 한때 취미였던 요리는 왜 이렇게나 귀찮은 집안일로 전락해 버린 걸까. 설거지를 하며 다시 또 다짐한다. 내일부터는 꼭 제대로 해 먹어야지.


건강하게 밥을 차려먹는다는 건 삶을 돌보고 있다는 증거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무기력에 빠지면 항상 요리부터 그만두곤 했다. 스트레스를 푼다는 핑계로 맵고 자극적인 배달 음식을 먹고 수면 패턴이 다 망가지도록 이상하게 잠을 잤다. 아무리 생각해도 식사를 돌보지 않으면서 건강한 삶을 챙기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손수 차린 한 끼가 모여 건강한 삶이 되는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 밥을 차려 먹을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백수 생활의 우선순위 두 번째는 '건강한 습관'. 하지만 쓸데없이 거창한 결심은 하지 않기로 한다. 건강한 삶은 대단한 결심보다 가지 하나를 먹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냉장고 속 가지가 물러 터지기 전에 꼭 가지 카르파치오를 해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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