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겜

백수일기 12

by 미지

동경하는 삶을 생각하면 두 단어가 떠오른다. 서퍼, 그리고 즐겜러.


바다와 바람을 다 알지 못해도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싣는 서퍼처럼 살고 싶다. 바꿀 수 없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삶. 또, 망겜도 즐기는 진정한 즐겜러가 되고 싶다. 전직, 승급 이런 거에 목숨 걸지 않고 즐기는 마음으로 퀘스트를 깨는 진짜 즐겜러.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독일의 한 심리치료사가 한 말이 유행하는 것처럼 즐기는 것은 어느새 노력 만큼이나 중요한 미덕이 되었다. 구직을 하다 보면 단순히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 일에 몰입해서 즐길 수 있는 '덕후'를 뽑는다는 공고도 종종 보게 된다. 이제 즐기는 것마저 경쟁력인 세상이다.


회사 동료들이나 지인들은 나를 즐겜러로 쉽게 오해한다. 회사 내에서 연말정산 도서공연비 1위를 차지한 덕분일 것이다. 내한 가수 몇 분과 밴드 몇 팀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하지만 문화생활을 많이 한다고 인생을 잘 즐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도무지 즐겜러로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겠다. 호모 루덴스라는 말도, 즐기는 사람이 최고라는 명언 수십 개도 망겜의 기운이 느껴지는 백수 생활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백수 생활 초반에 지원한 곳들이 감감무소식이다. 분명 연락이 올 만한 곳들도 이상하게 응답이 없다. 이전 이직 때는 더 조건이 좋은 곳들에서도 연락이 왔는데 구직 사이트 알림도 메일함도 고요하기만 하다. 인풋을 쌓으며 이 시간을 즐기자고 다짐했는데 살짝 초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이직 제안을 주셨던 전 상사분의 말씀과 정체불명의 포지션 제안을 떠올리며 굶어 죽지는 않을 거라고 정신을 붙잡아 본다. 그래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직장인 시절 그렇게 부르짖던 여름방학이 막상 시작됐는데 왜 즐기지 못할까?


우주에서 보면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한 나. 지구에서 아무런 사명도 없는 나. 인류의 미래나 국가의 미래가 손에 달린 대단한 사람들처럼 꼭 해내야만 하는 일 같은 건 없다. 평범한 지구인인 나는 태어난 김에 잘 놀다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즐겜러로 살지 못하는가.


불안이나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잘 다스려지지 않을 때마다 망겜도 빡세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성질머리를 탓해본다. 사실 이런저런 핑계를 다 걷어내고 나면 지금에 머무르지 못하는 나 자신이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은 항상 과거에 머무르고, 생각은 미래에 가 있고 오직 몸만 현실에 덩그러니 있기 때문에 즐기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유가 무엇이든 온 세상이 시끄럽게 떠드는 즐겜러 필승의 파도 위에서 서핑을 하듯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즐겁게 퀘스트를 깨자. 경험치를 채워서 빨리 승급하려고 애쓰는 삶을 추구한 적도 없으면서 초조해하지 말자. 맵에 숨겨진 재미를 찾고 NPC도 구경하자.


거리의 다홍빛 능소화도, 복숭아와 자두 한 입의 달콤함도 누리지 못한다면 오랜만에 찾아온 여름방학이 너무 아쉬울 것 같다. 새콤한 냉 파스타도 먹고 평양냉면 맛집도 찾아가야지. 열대야로 고생하기 전에 밤산책도 즐겨야겠다. 이번에는 꼭 눈앞의 퀘스트에 목매지 않고 사는 즐겜러가 되어야지. 추구미를 이뤄보리라.




이번 여름 퀘스트

러닝 다시 시작하기

차지키 소스 만들어서 잔뜩 먹기

능소화 발견하면 사진 찍기

새로운 평양냉면 맛집 가보기

<케이팝 데몬 헌터스> 보기

밀리에서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읽기

히사이시 조의 Summer 피아노 연주하기

진짜 맛있는 팥빙수 먹기

나머지는 일기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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