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13
백수 10일 차의 아침, 눈을 뜨자마자 본 건 책상 위 오층 탑이다. 독서를 하겠다고 꺼내둔 책과 다이어리, 노트가 책상 한편에 대충 쌓여 있었다. 책상 위에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고 살기로 다짐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역시 작심삼일이다. 멍하니 책등에 적힌 제목을 읽는다. '일이란 무엇인가' 얼른 일이 뭔지 알아내고 이 책을 알라딘에 갖다 팔고 싶은데 병렬 독서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미니멀 라이프는 오랜 꿈이다. 침대 하나 없이 텅 빈 방에 살거나, 배낭 하나에 모든 짐을 다 넣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궁극의 미니멀 라이프는 아니더라도 쓸데없는 물건으로 스트레스받지 않는 단순하고 정돈된 삶을 이루고 싶다.
지금이다. 짐들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미니멀을 꿈만 꾸는 동안 미니멀리스트 유튜버들의 영상을 닳도록 봤다. 책도 여러 권 읽었다. 오리엔탈리즘이 느껴지는 이상한 의식을 치르며, 설레지 않으면 다 버리라고 하는 곤도 마리에의 넷플릭스 시리즈도 정복했다. 이제 남은 건 오직 실천뿐이다.
대부분의 정리 영상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추억이 없는 물건부터 버리라는 것. 추억이 있는 물건에 손을 대는 순간 망설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옷장부터 열었다. 엄마가 인정할 정도로 또래에 비해 옷을 잘 사지 않는 편인데도 옷장이 빽빽하다. 네다섯 벌 정도를 버리려고 꺼내고 나니 한때 가장 좋아했던 분홍색 블라우스가 나타났다. 7~8년 전에 샀는데 아직까지도 가장 마음에 드는 블라우스다. 목 부분이 답답하지 않은 디자인에 회색이 섞인 듯한 부드러운 뮤트 핑크, 적당히 실키한 재질이 딱 내 취향이다. 그런데 이 옷을 입지 못한 지 몇 년이 지났다. 회사를 다니며 살이 쪘기 때문이다. 버릴까 말까 계속 망설이다가 다시 옷장 안에 걸어두었다. 이대로라면 옷장 정리는 또 실패다.
다음은 책이다. 이 작은 원룸에서 가지고 있는 책이 50권이 넘는다. 내 돈으로 산 책, 선물 받은 책, 회사 도서구입비로 산 책, 그리고 애매한 수험서와 방통대 교재까지. 이렇게 공간을 차지할 거면 책들이 월세를 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알라딘을 켜 팔면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 바코드를 찍어본다. 매입 불가, 균일가 매입. 이 더위에 이걸 들고나가서 파는 게 더 고생인 것 같다.
옷 몇 벌과 책 두세 권을 정리한 것으로 오늘의 미니멀 도전이 끝나버렸다. 방은 곧 그 사람의 정신 상태라는 얘기를 어디서 본 적이 있다. 그 말대로라면 내 정신 상태는 곧 정리정돈이 하나도 되지 않은 엉망진창의 옷과 책 무덤인 셈이다.
10년 넘는 자취 생활로 쌓인 짐이 하루아침에 정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단 더 짐을 만들지 않기로 다짐한다. 일단 사지 않기. 그리고 살을 빼서 옛날 옷을 다시 입겠다는 기대와 이별하기. 안 읽고 쌓아둔 책을 다 읽을 수 있다는 야심을 버리기. 할 일을 적다 보면 결국 다 마음가짐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단순하게 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