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20
체르니 연습곡을 한 번 칠 때마다 사과를 세 개씩 색칠하던 어린이는 자라서 작고 소중한 월급으로 피아노 학원 수강료를 내는 어른이 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만둔 피아노를 직장인 취미생으로 다시 시작한 지도 어느덧 3년. 피아노는 이미 내 삶의 일부이기에, 백수가 된 후에도 레슨과 연습을 이어가고 있다.
피아노를 치면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좁은 연습실에서 혼자 명상에 가까운 상태로 피아노를 칠 때다. 특히 같은 부분을 반복 연습하거나 곡 전체를 계속 반복해서 연주할 때, 잡다한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이렇게 제대로 몰입한 상태로 피아노를 치고 나면 복잡했던 머리가 비워지면서 마치 명상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다음으로 좋아하는 순간은 선생님에게 칭찬을 들을 때다. 3년 동안 세 명의 피아노 선생님을 만났는데, 지금 피아노 레슨을 담당하는 세 번째 선생님은 수업이 가장 스파르타인 데 비해 아주 다양한 칭찬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다. 선생님을 만나고 난 후부터 주변에 취미 피아노를 권유할 때마다 '칭찬 테라피'를 받을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다 큰 어른이 어디 가서 이렇게 많은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성실하게 연습하기만 하면, 선생님은 직장인의 노력을 끝도 없이 '리스펙'하며 칭찬을 쏟아낸다. 예쁜 말 양파도 이 정도로 많은 칭찬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연습실 밖을 나가면 재능 넘치는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듣는다. 연주 실력보다 듣는 귀가 더 빨리 좋아지는 게 성인 취미생의 숙명이다. 내 연주가 취미생 치고 괜찮은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연주에 비해 얼마나 형편없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할당량이라도 있는 것처럼 칭찬을 하고, 절대 빈 말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백수가 되고 두 번째로 피아노 레슨을 받는 날, 어김없이 선생님의 칭찬 세례가 쏟아진다. 오늘의 칭찬은 "금방 완성이 될 것 같다", "짧은 시간에 어떻게 했냐", "가르친 수강생 중에 이 곡을 가장 잘 친다" 등이었다. 지난 1년 동안 들어본 칭찬 중에 가장 웃겼던 건 "음악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를 배울 때 단 한 번도 전공을 권유받은 적이 없다. 심지어 동네 콩쿠르에 나가 이름 모를 참가상 같은 걸 받았을 때조차도 원장 선생님은 축하한다고만 했다. 예체능 재능을 돈으로 팔면 과자 한 봉지 값도 안 나올 사람에게 음악성이 있다는 칭찬이라니, 아마도 음악을 좋아하는 취미생을 향한 선생님의 애정 표현일 것이다.
사실 날아갈 것처럼 기분이 좋아지는 칭찬은 따로 있다. 첫 번째는 성실하다는 말이고, 두 번째는 정확히 연습한 부분을 알아봐 주는 칭찬이다. 아무리 예쁘고 좋은 말이라도 들인 노력을 알아봐 주는 것보다 기쁜 건 없다. 이런 칭찬은 성실하고 꾸준한 연습 없이는 절대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더 값지다. 그리고 칭찬을 들은 뒤에는 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재능이 있는 취미생은 아니지만, 성실한 취미생이라고 자부한다. 회사를 다니고 야근을 하던 시절에도 최대한 주 4~5일 이상은 연습하려고 노력했다. 경험상 최소 다섯 시간은 연습을 해야 다음 레슨을 의미 있게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습실에 들어가면 지적받은 부분을 중심으로, 배운 방법 그대로 연습하려고 노력했다. 화음으로 연습하라고 하면 그렇게 했고, 도약을 연습하라고 하면 틀리지 않을 때까지 같은 부분을 연습했다. 항상 지적받은 부분을 고쳐서 다음 레슨에 가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었는데, 유독 지금 선생님이 그런 부분을 잘 알아봤다.
들인 노력이 떳떳할 때 돌아오는 칭찬은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인생을 벼락치기로 살았던 날들이 많지만, 피아노만큼은 성실하다는 칭찬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타인이 뭐라고 말하든 퇴근 후 많은 나날을 성실하게 임했다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레슨 중 백수가 됐다며 짧은 잡담을 주고받는 동안 선생님은 다시 칭찬 모드를 켰다. 선생님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피아노 치는 것만 봐도 일을 너무 잘할 것 같다"거나 "요즘 면접도 보기 힘들다는데 너무 대단하다" 같은 칭찬을 퍼부으며 백수 탈출을 응원했다. 그렇게 성실하지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터라 선생님의 칭찬이 머쓱했다. 이런 칭찬을 즐길 수 없는 건, 백수 생활이 썩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연습을 많이 하지 못한 주에 레슨 전날 벼락치기로 피아노를 연습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레슨을 하려면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선생님에게 '레슨하는 게 즐거운 수강생'으로 오래 남고 싶었다고나 할까. 정말 성실히 연습해서 칭찬을 받은 날도 있었고,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싶어 성실한 척한 덕분에 칭찬을 받은 날도 있었지만 그 모든 시간이 모여 결과적으로 성실한 취미생이 됐다.
그러니 선후관계는 일단 잊어도 되지 않을까. 이미 칭찬을 받아버렸으니, 받은 칭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보기로 한다.
멋진 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