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와 열대야

백수일기 29

by 미지

친구와 냉면을 먹기로 한 날이었지만, 우리는 약속을 미루기로 했다. 서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약속을 취소했다. 맛있는 평양냉면을 먹자고 35도가 넘는 날씨에 웨이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가해졌다. 산책 나가기 딱 좋은 시간이었지만, 그냥 에어컨 바람에 몸을 맡기고 누워 있기로 했다. 밖이 팔팔 끓는 탓에 에어컨을 내내 틀어도 춥지 않았다. 오늘 세 곳에 이력서를 냈으니 구직 활동도 충분히 했다. 조금 게으른 저녁을 보내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 여름이 남은 생에 가장 시원한 여름일 거라는 말을 몇 년째 접하고 있다. 한낮의 여름을 겪을 때마다 그 말에 수긍하게 된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헤어드라이어 바람 같은 공기 때문에 살갗이 따갑다. 원한 적 없는 백수 생활이지만 이런 날씨에 외출하지 않는 건 정말 만족스러운 일이다. 뽀송한 몸으로 바스락거리는 이불에 파묻혀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것. 여름에 이런 삶을 누릴 수 있으면 꽤 괜찮지 않나, 갑자기 행복해졌다.


여름은 아직 한참 남았다. 어쩌면 내 백수 생활도. 무더운 날씨를 견디며 일하는 날이 온다면, 이 사치스러운 방학이 아주 그리워질 것 같다. 오늘 밤은 열대야다. 해가 진 후에도 도시의 열기는 식지 않는다. 하지만 한낮의 더위도 열대야와 불면의 밤도 나의 것은 아니다. 오늘은 바깥의 여름을 알고 싶지 않다. 낭만도 없고 재미도 없지만 시원하고 자유로운 밤. 모로 누운 채 핸드폰을 만지다 그대로 잠들어도 좋은 밤. 행복이 아주 가까이에 있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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