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28
방을 치우다가 예전에 쓰던 필사 노트를 발견했다. 끝까지 다 채우지 못한 노트 안에는 또박또박 쓴 글씨가 가득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쓸 수 없게 된, 아주 정성껏 쓴 반듯한 글씨다. 두 번째로 필사한 글은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언젠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당시 필사한 것들을 보면 나는 어떤 답을 구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답을 얻고자 따라 쓴 수많은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몇 장을 넘기다가 당시의 고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모든 게 지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앞장으로 돌아와 필사한 문장 하나를 다시 읽었다.
그건 혹시 삶에서 지난했던 한 단계의 마무리는 결국 그 단계를 되짚어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완결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몇 년 전 지루하고 두려웠던 것들은 비로소 완결됐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는 다른 고통이 존재한다. 백수라는 사실, 구직하며 느끼는 불편함, 수많은 거절, 이 많은 시간을 잘 쓰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자괴감,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흔들리는 기준,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상한 습관, 떳떳하지 못한 하루를 보냈을 때의 우울함, 들어오지 않는 월급, 엄마와 통화할 때 느끼는 답답함, 그냥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 하지만 이제는 이런 걸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이유를 찾으려고 드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보낼 것은 보내야 한다는 것도.
처음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을 때 쓰려던 글은 백수일기가 아니다. 몇 편의 글을 써두었다가 방치한 브런치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비슷하고 희미할 수밖에 없는 하루하루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록해두고 싶기 때문이었다. 매일 기록하기 위해서는 뻔한 하루에서 무엇이라도 꺼내야 한다. 감사든, 우울이든, 타인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든 뭐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에는 아무것도 쓸 수 없기 때문에 우울하기라도 해야 기록할 수 있다.
성격상 일기나 기록을 잘 보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것, 지금보다 어렸던 내가 쓴 글을 읽을 때면 아주 소중한 편지를 받은 느낌이 든다. 지금 이 글도 그럴 것이다. 미루기는 해도 빠트린 적은 없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다. 아무리 뻔하고 지루하더라도 백수 생활이 끝날 때까지 모든 하루를 기록할 것이다. 이건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다.
어느 날의 나에게.
2025년 7월, 백수인 내가.
사랑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