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방향

영화 <시> 리뷰. 나로부터 나에게로.

by 블블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는다.


남미 여행의 끝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영화제가 열렸다. 어떤 영화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시내에 나가 방황하다 이끌리듯 표를 끊고 들어가서 관람했던 영화였다. 스페인어도 영어도 못하는 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시>였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 만나는 인연도 있다. 나한텐 이 영화가 그랬다.


<시>가 국내에서 개봉했을 때, 전공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그 영화를 언급하셨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당시 교수님의 요지는 이랬다. 자신의 손자가 성추행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사실을 경찰서에 신고하는 할머니가 한국에 존재할 수 있냐는 말이었다. 경찰에 미리 신고를 해놓고, 손자와 배드민턴을 칠 수 있는 할머니라니. 어떻게 서든 숨기려 하고 막으려 하는 게 보편적이지 않냐는.


아마 소설 속 세계는 비록 허구 더라도 리얼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던 도중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영화를 보지 않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던 말이었다. 몇 년이 지나 지구 반대편에서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수업시간으로 돌아가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졌다. 내가 보기에는 할머니의 한국적이지 않은, 혹은 한국적이지 못한 행동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내가 믿을 수 있는 말은 ‘나는 나를 용서하기로 했다’는 말이다. 용서는 결국 내가 나에게 구하는 것이다. 남이 나에게 해주는 것은 용서라는 이름의 ‘매너’ 같은 거다. 처음 만나면 악수를 하고 자기소개를 하는 것처럼, 어른이 수저를 들면 식사를 시작하듯이. 누군가 사과를 구하면 용서를 해주는 거다.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아, 난 용서받았다’는 안도감이 필요할 뿐. 용서하는 사람 역시 사과한 사람이 무안하지 않도록 용서했다 말할 뿐. 각자의 유용함이 있을 뿐 용서라는 행위 자체로 그 무엇도 정화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용서란 서로 더 곤란하지 않기 위해 ‘우리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감정 소비하지 말자’ 합의하는 행위이다. 고도로 발달한 끝내기 매듭 같은 것이다. 둘 사이의 세련된 합의이지, 정말 그 일에 관한 감정과 상처가 그 형식 자체만으로 사라지진 않는다. 있던 일이 없던 일은 될 수 없기에 한 인간이 타인을 용서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용서는 감정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자기 자신을 향할 때만 가능하다. 벌어졌던 일을 상기시켜도 그 사건에 굴복하거나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때 더 이상 꾸짖지도, 벌 주지도 않고 덮어둘 수 있다.




<시>에서의 할머니도 자신을 용서해야만 했던 것이다. 시를 모르고 살았던, 인간임을 망각하고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세상 도처에 폭력에 무관심했던 자신을. 스스로를 용서하고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손자를 신고할 용기를 실천할 수 있었으리라. 용서는 결국 내가 나를 구원하는 일이다.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설득하고 용서하는 인간을 말하고 있었기에 나에겐 이 할머니의 국적이 한국이든 구라파든, 아메리카든 상관이 없었다. ‘인간다운 인간’을 이야기하는데 영화의 배경이 –공간적 특수성-이 그다지 주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혈육이 섞인 손자보다 피해자 소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는 건 할머니 스스로도 이해받지 못하는 삶, 피해자로서의 삶을 쭉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자신 같은 피해자를 또 만드는 일에 가담할 수는 없었을 거다. 이미 자신의 삶을 무수히 할퀴고 지나갔던 폭력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폭력 인지도 모른 채 당해왔던 세월을 생각하면.


성추행한 손자를 신고한 자신을 납득할 수는 있어도, 성추행당한 소녀를 모른 척 한 자신을 떠안고 살아가진 못했을 거라고. 자신에게 매정하다 손가락질하는 타인의 비난을 받을지언정, 그런 자신을 스스로 결코 용서할 수 없었을 거라고.



타인의 용서 없이는 살아가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은 버틸 수 없음을.


영화가 끝나자, 옆에 앉아있던 일본인 여자가 엉엉 울고 있었다. 눈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며 나에게 물었다. 아까 영화 속에서 가해자 학생 학부모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어디냐고. 가해자 중 한 명의 학부모가 운영하던 부동산 중개업소라고 말해주었다. 아주 투박한 영어로. 커미션, 렌트, 빌딩, 하우스, 뭐 이런 단어를 섞어가면서.


이 여자에겐 어떤 어려움이 있었기에 이런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울까 생각했던 것 같다. 끝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일이 있었을까. “돈 크라이”라 내뱉고 ‘이츠 오케이’라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 이츠 오케이라 말할 수 있을 때, 정말 이츠 오케이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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