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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자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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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Nov 26. 2019

나의 나와바리

자취일기_15

오랜만에 광화문에 왔다. 예전에 살던 곳 근처에서 새로운 과외를 맡게 되어, 저녁에 길음동으로 가야한다. 가기 전에 서점에 들리고 싶어서 광화문 교보문고에 왔다. ‘여기 참 오랜만이네’라는 생각도 잠시 자취를 시작하고 이 동네 올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사를 할 때는 방도 중요하지만 동네도 참 중요하다. 내 ‘나와바리’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길음동 모부의 집에서 지낼 때에는 성북동, 혜화동, 광화문 일대를 참 많이 돌아다녔다. 여러 번호의 버스가 위 세 곳을 지나는 동일노선을 지났기 때문에, 버스 정류장까지만 나오면 아무 버스나 타도 거의 위의 동네들을 거칠 수 있었다.           



나는 그 길들과 분위기를 참 좋아했다. 특히 성북동은 지하철역이 멀리 있어서 조용했다. 지금은 위트앤시니컬이 자리잡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우체국을 지나, 장면총리가옥을 지나, 혜화초등학교를 지나, 오르막길을 올라, 경신고와 한성과학고를 지나, 성북초등학교를 지나, 한성대 입구로 이어지는 산책길은 내 최애 코스였다. 친구들이 동네에 놀러오면 길상사에 들러 백석과 나타샤에 대한 옛이야기를 몇 번이고 떠들었다. 그깟 돈 백석 시 한 줄 만도 못하다며 법정스님께 술집으로 운영되던 요정을 절로 기부했다던 한 여자에 대해 생각한다. 백석은 이미 부인이 있었다는데. 예전에는 참 낭만적으로 들렸던 이야기들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린다.         


        

그 길들에 있는 카페들도 참 좋아했다. 북카페 부쿠나 알렉스 더 커피나. 수연산방의 누마루나. 요새는 명물이 되어 주말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자리 찾기도 힘들어졌지만. 부쿠의 야외석에 앉아있으면 항상 고양이들이 한 두마리씩 자신의 나와바리인 양 사뿐히 나타나서 재롱을 부리곤 했는데, 이번 가을엔 부쿠에 들려보지도 못한 채, 12월을 맞을 것 같다. 나와 경신고 앞을 함께 걸어본 사람은, 적어도 내 세계에 한번은 초대됐던 사람이다. 나의 나와바리에 기꺼이 방문해 준 사람이다. 그 길을 걸으며 나눈 이야기들은, 내용은 잊힐지언정 분위기는 잊히지 않는다.


                

생활의 터를 신수동으로 옮기고 나니, 아무리 시간이 있어도 성북동을 찾을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 자취 10개월 차. 지금은 경의선 숲길의 고양이들을 더 빈번히 만난다. 일주일에 두 번 필라테스를 가는 아침 9시 50분쯤에도, 일주일에 한번 상담을 받으러 가는 오전 11시에도, 오늘은 고양이가 잘 있나 두리번거리게 된다. 풀밭이 보이는 순간, 비둘기들이 모여 모이를 먹고 있다면 지금은 고양이가 없는 것이다. 고양이가 있을 때에는 곧잘 사냥놀이를 하는지, 비둘기들이 옆 건물 옥상 난간으로 도망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둘기들이 가득 있는 날에는 좀 아쉽다. 고양이 보고 싶은데. 날씨가 쌀쌀해진 요즘엔 고양이 집이 생겼다. 길냥이들을 챙기는 누군가가 준비한 따뜻한 공간인 듯 했다. 오늘 아침엔 그 집에서 나오는 고양이와 마주쳤다. 표정이 너무 늠름해서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자마자 자리를 떠났다.           



‘나와바리’가 바뀐 기분이다. 더 이상 성북동의 고양이는 마주치지 못하는데, 신수동 고양이의 안부는 챙기게 되었다. 광화문 교보문고보다 합정에 있는 교보문고를 더욱 더 빈번히 가게 되었고, 한성대입구의 스타벅스보다, 합정에 있는 할리스커피를 더 자주 들리게 되었다. 일산에 자리를 잡은 친구들이 많은데다 파주에서 일하는 친구들도 더러 있어서 약속 장소는 거진 합정이 되고야 만다. 6호선 근처에 살면 이태원 쪽에 많이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자주가진 않는다. 이제 밤에 산책을 나가면 경의선 숲길을 따라 걷고, 공덕과 마포역을 지나, 마포대교를 건너, 한강공원을 짧게 걸어 서강대교를 다시 건너 돌아온다. 다리 위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여전히 낯설다. 키 작은 나는 마포대교를 건너면서는 강물이 오히려 잘 보이지 않는다. 서강대교는 밤섬을 지나가는데, 철새보호구역이라 다리 바깥쪽에 라이트가 켜져있지 않다. 그래서 살짝 어둡고 조용한 서강대교가 왜인지 통로도 넓고 간지러운 문구가 많이 새겨진 마포대교보다 더 좋다. 이런 호불호가 차곡차곡 쌓일 때마다 이제는 어엿한 신수동 주민이 된 것 같다.                



왕복 12차선 대로의 광화문 사거리에 서 있으면 어느 쪽 길이라도 익숙해서 내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을 떠올리게 된다. 성북천을 누비던 나는 시장통 속 뉴타운으로 묶이는 정신없는 길음동 집을 얼른 벗어나고만 싶었다. 막상 신수동 주민이 되고나니 성북구에도 내가 좋아하던 곳이 많았다는 걸 깨닫는다. 더불어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지금의 ‘나와바리’는 언제까지 가능할까. 이 방의 계약이 끝나고 나면 어디서 또 나의 새로운 나와바리를 개척해나가야 할까. 이대역과 신촌역 주변, 아현동 근처 거대한 규모로 세어지고 있는 아파트 단지들을 목을 꺾어 올려다 보면서, 이곳의 고양이들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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