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일기_14
글을 쓸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매주 한 편을 올리겠다는 다짐은 또 이렇게 아스라이 다른 은하계로 흩어져갔다. 하.
글로 써봐야지 했던, 마음의 흔들림을 주는 작은 자극들은 물론 있었다. 차라리 없었으면 핑계라도 댈 텐데. 슬프게도 있었다. [인상적인 순간을 고이 간직-타자기를 두들김-문자가 저장된 데이터를 생산] 이 과정의 시작과 끝은 세상에서 가장 먼 A와 B 사이의 거리를 구하는 기분이다. 무한대의 시공간이 가로막고 있는 것 같다. 에세이 두 편을 2주째 못쓰고 있는 지금이 그렇다. 마음은 까마득한 블랙홀로 빨려들어간다. 근 5~6년간 내게 가장 익숙한 사고패턴이 다시 떠오른다. 이렇게나 꾸준하지 못하고 끈기가 없는데, 글을 쓸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친구들을 불러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었던 이야기. 괜히 내 누추하고 불편한 방에 오라고 했나. 큰 상도 없는데 어떻게 여기서 만들기를 하지. 전날 현실자각타임을 가졌던 나. 하필이면 하루 종일 비가 와서 사람들이 이미 내 방까지 오면서 지치면 어쩌지 고민을 했던 이야기. 친구들이 하나 둘 도착해 저녁을 먹고, 카드를 만들고 있는 순간까지도, 나만 재밌는 거면 어떡하지, 나만 음식이 맛있는거면 어쩌지. 불편한데 애써 내색안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걱정하고 불안했던 그 날의 묘한 감정들.
또 어떤 날은 세탁기 헹굼 탈수버튼을 눌렀더니 예상소요시간 24분이 떴다. 이미 옷을 다 입고, 나가려다가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탁’만 눌러놓았던 빨래가. 섬유유연제를 알맞은 타이밍에 넣고 싶었다. 표준으로 자동설정 해 놓으면 늘 시간을 깜빡하고 헹굼을 한참 하는 중간에 섬유유연제를 넣었다. 그래서 수동모드 ‘세탁’만 해놓았던 것인데. 이번엔 아예 헹굼 탈수를 잊었던 것이다. 빨간 디지털 숫자로 뜬 2와 4라는 숫자를 보면서 불안했다. 족쇄에 갇혀 이대로 주저앉았다가 24분후에 결국 이 방을 못빠져나갈까봐. 방 어디에도 앉아있지 못하고 24분동안 동동걸음만 쳤던 날도 있었다. 꼭 나가야 할 약속이 없는데 굳이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일은 무기력과 우울감을 겪는 나에게는 10km달리기처럼 큰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탈수까지 마친 빨래를 건조대에 널고, 약 30분 뒤 방탈출에 성공한 날의 기분에 대해서도.
이런 이야기들, 자취일기에 꼭 써서 올려야지 해놓고는 증발시키고 있었다. 강렬했던 감정이 옅어지고 나면, 글을 쓰고자 했던 의욕까지 휘발되어 버리니까. 정작 글로써 완성 짓지는 못하고 그때부터 계속 되새김질하듯 단어들을 품게 된다. 크리스마스카드. 11월 17일. 예상소요시간 24분. 언제라도 써먹으려고 틈만나면 그렇게 입으로 중얼거린다. 강박은 베스트셀러 작가보다 더 느끼면서도, 실제로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확보하지 못한단 생각에 늘 괴롭다.
그래서 훌훌 털어버릴려고 일단 이렇게라도 멋없게 휘갈겨 써서 올린다. 이경미 감독님이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에서 그랬다. 똥을 싼다. 글을 쓰는게 아니라 쓰레기를 만든다 생각하며 쓴다고. 그럼 좀 더 한결 가볍게 뭐라도 만들 수 있게 된다고. 자기검열도 자기객관화도 다 필요없다. 나는 오늘 그래도 (쓰레기일지언정) 썼다. 3주째까지 미뤄지지 않아서, 그나마 1주일 먼저 탈출해서 다행이다. 막상, 쓰레기같다 하며 썼어도, 그동안 올렸던 자취일기 글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웃프다. 하. 얼른 빨리 올려버려야지. 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