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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자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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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Oct 30. 2019

가을날의 고양이

자취일기_13

        

보일러가 고장났다. 한참을 물을 틀어놔도 냉랭한 물만 쏟아져 나온다. 손은 자꾸 차가워지고, 벗은 몸에는 여기저기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필라테스를 하고 와 몸은 이미 한바탕 땀을 흘렸는데, 샤워를 해야 하는데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 보일러 조절기를 보니 점검에 빨간 불이 들어와 깜빡깜빡 거리고 있었다. 보일러는 우웅우웅 소리를 냈고, 본체는 뜨거웠다. 막 이사를 왔을 무렵에도 한번 이랬던 일이 있었는데, 꺼놨다가 다음날 작동시켜보니 별 문제 없었더랬다. 그래서 지금껏 잘 사용해왔는데. 그래서 어제 점검에 불이 들어왔을 때도 내일 켜면 다시 되겠지 하고 잠들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하는 곳에서 샤워 하고 올걸. 땀에 절었던 옷을 다시 주워 입었다. 집주인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자신은 지금 지방이라며 연신 ‘어쩌지’만 내뱉으셨다. 아저씨는 내가 기사를 불러서 괜히 수리비가 더 나오는 상황을 걱정하는 듯 했다. 자기가 고치거나, 자기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하는게 더 저렴한 것일까. 그럼 나는 내일저녁까지. 아니 저녁에 오시면 그 날 바로 고쳐주실건가. 내일 모레까지도 온수가 안나오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휴일의 평화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씻고 싶은데.


      

일단 내일 저녁에 와서 바로 봐주셔야 한다고 전화를 끊고 앉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게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참을 일인지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집주인이면 이런 일은 돈이 얼마가 들어도 빨리 해결해줘야 하지 않나? 자기집 딸이 못씻어도 이럴 건가. 세상 친절하게 전화를 끊고 혼자 화를 내고 있는 나. 요새 이런 일이 빈번했다. 말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는 제대로 화내지 못하고 혼자가 되면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일. 어쩜 이렇게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고분고분 잘 컸는지. 갑자기 서러워졌다. 방에 널부러진 토(toe)삭스를 겨우 집어 빨래통에 집어넣고, 오늘이 쉬는 날이라 다행이지 생각을 고쳐먹으려고 애써봤다.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세면도구도 챙겼다. 동네 목욕탕에 가려고. 일단 씻어야 그 다음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우나에 샴푸가 얼마였더라. 편의점에서 적은 용량의 샴푸를 사가는게 나은가 어쩐가 고민하며 집을 나섰다. 정오가 지났는데도 공기가 차가웠다. 확연히 쌀쌀해진 날씨였다.     



수정탕은 대학생일 때 한번 가봤던 기억이 있다. 학생회 활동을 함께 하던 친구 서넛이서 갔었는데, 다 커서 친구들과 알몸으로 있었던 적은 처음이라 안보는 척 유심히 친구 몸을 관찰했던 기억이 있다. 간 지 한참이라 이용료를 알아보려고 검색했는데, 수정탕이라고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 것도 웃음 포인트였다. 내 기억속엔 분명하게 ‘수정탕’인데, 분명 현재 존재하고 있는 곳인데! 아무튼,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글 생각을 하니 조금은 기분이 풀렸다. 팔목에 차는 고무줄 열쇠를 받고, 들어가니 맨몸의 중년여성들이 상당했다. 이 시간에도 사람이 많구나. 그러고보니, 이 동네는 빌라가 많아서 화장실에 욕조가 없는 집이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24시간 운영해도 수익이 나는 구조일까. 탈의실은 너무 깨끗하고 따뜻했다. 서둘러 옷을 벗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그래도 오래된 목욕탕이라서인지, 수도를 틀어도 물이 나오지 않는 자리도 꽤 많았고 온도조절도 용이하지 않았다. 일단 H와 C의 표기가 다 지워져 어느쪽으로 돌리면 따뜻한 물이 나오는지 한참 헤맸다. 이정도였나? 내가 왔던 때도 이제 10년전쯤이니 그 후로 손보지 않았다면 짐작되는 연식이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들이 알몸으로 함께 몸을 씻는 광경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다른 데서 알몸인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데, 문 세 번 열고 들어왔다고 여기는 모두 벗고 있어야 하다니. 나는 이번에도 안보는 척 하면서 다른 여성들의 몸을 관찰했는데, 저마다 다 달라서 열대우림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고온다습한, 처음보는 식물들로 가득한 열대우림. 할머니들은 열심히 몸을 불려 때밀이로 구석구석을 밀고 계셨고, 샤워부스 설치대 위마다 세신사분들이 마시며 일하는 식혜, 주스 같은 음료들이 올려져있었다. 탕 속에는 너댓명의 아주머니들이 몸을 담그고 있었다. 엉덩이와 뒷허벅지의 주름, 살짝 늘어진 가슴들이 마치 나무의 나이테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탕 속에 앉았다. 이틀전 등산으로 잔뜩 뭉친 허벅지를 계속 주물렀다. 샤워기로 다시 한번 물을 끼얹고 얼른 나왔다. 오랜만에 동전 넣어야 되는 드라이기와 아무도 안 쓸 것 같은 대용량 스킨 로션도 보았다. 동전이 없어 대형 선풍기 앞에 서서 열심히 머리를 말렸다.      



옷을 섣불리 입자 탈의실이 매우 덥게 느껴졌다. 다 씻고도 발갛게 상기된 볼과 한껏 더 뽀글해진 머리로 늘어지게 수다를 떨고 있는 아주머니들을 뒤로하고 수정탕 밖으로 나왔다. 왜 이사 오고 나서 목욕탕에 갈 생각을 한번도 안했을까. 이렇게 가까운 곳에 목욕탕이 있는데 말이다. 20대에 수영장도, 대중목욕탕도 가기 싫어했던 내가 떠올랐다. 내 못생긴 몸에만 집착하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몸들이 있는지 모르고 살았구나 싶었다. 나는 나다운 몸을 지녔는데. 그 땐 그렇게 나다운게 멋지단걸 몰랐을까. 기온이 올랐는지 덜 마른 젖은 머리였는데도 들어갈 때보다 훨씬 덜 추웠다. 몇 발자국 걸어 경의선 숲길 산책로로 올라오니, 잔디밭 한 가운데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네 다리를 쭉 뻗고 꼬리를 흔들거리며 햇빛을 쬐고 있었다. 온수가 차단된 일 하나로 씻는 일 전부가 번거롭고 귀찮았는데, 목욕 후 개운한 상태로 고양이를 보고 있으니, 다 괜찮은 것 같았다. 오랜만에 목욕탕에 간 일도, 이렇게 씻고 나와 일광욕하는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는 일도.



아직 오지 않은 나의 미래에도 이런 순간이 마련되어 있을까. 번거롭고 귀찮은 일들 속에서도 일상을 지키려고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다 괜찮은 것 같은 장면이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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