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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자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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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Oct 25. 2019

금요일 금요일은 즐거워

자취일기_12

금요일은 루틴이 좋다. 뭘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해야하는 일로 꽉 차 있다. 착실히 그 일들을 수행해내기만 하면 하루가 알차게 흘러간 느낌이다. 토요일에 출근함에도 불구하고 금요일은 내게 매우 기쁜 요일이다. 


일단 아침에 눈을 뜨면 급하다. 나는 항상 최대치의 잠을 자는 사람이기 때문에 최대한 늦게 일어나는 편이다. 금요일엔 오전 11시 상담이 있다. 내 방에서 상담실까지 순수하게 도보로 이동시간만 20분 정도 걸린다. 10시부터 꼼지락거리며 트위터를 하다 10시 20분 정도 되면 정신을 차린다. 겨우 침대를 빠져나와 세수와 양치를 간단히 하고, 옷(보통 어제 입은 옷)을 걸친 뒤, 바나나나 사과를 먹고 10시 40-45분쯤 집을 나선다. 상담실 도착까지 시간이 매우 아슬아슬하기 때문에, 경보하는 느낌으로 재빠르게 걷는다. 상담실이 위치한 건물은 캠퍼스 내 높은 쪽에 있어서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헉헉거리며 걷는다. 이 계단으로 말하자면 학부시절부터 지각의 위기를 느끼며 오르내리던 계단인데, 후문부터 상담실 건물까지 계단 수가 상당해서, 대단한 세계유산이라도 보러 가는 기분이다. 다 오르고 나면 랜드마크라도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강의실이다. 암튼 내가 서른 넘어서도 그 계단을 헉헉 거리며 오르락내리락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11시 5분쯤부터 숨을 고르고 상담을 시작한다. 트위터를 하다 정줄을 놓치면 10분 정도 더 늦을 때도 있지만, 지각을 하더라도 꼭 어떻게든 가려고 한다. 방을 빠져나오지 못해 한 주 상담을 건너뛰게 되면 하루종일 더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한번은 깊게 잠이 들어 일어나지 못해서 상담 선생님이 11시 15분에 건 전화를 받고 깬 적이 있었다. 그 날은 11시 40분이나 돼서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갔지만, 그래도 가려고 한다. 


보통 통곡을 하다 나오므로 상담을 마치고 나오면 얼굴은 엉망진창이다. 눈은 벌개지고 퉁퉁 부어서 훌쩍거리며 캠퍼스를 좀 걷는다. 최대한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최대한 캠퍼스를 둘러보는 루트로 좀 걷는다. 햇빛도 쬐고 바람도 좀 쐬고 나무도 꽃도 구경하다 보면, 훌쩍거림이 조금씩 조금씩 잦아든다. 저번 상담 이후 1주일동안 바뀐 학교 모습을 틀린그림 찾기 하듯 구경하며 걷는다. 그렇게 다시 일상으로 천천히 돌아온다. 


그리고는 마미손 칼국수에 간다. 도로만 건너면 도착할 정도로 캠퍼스와 아주 가깝다. 사장님 한 분이 운영하는 작은 칼국수 가게인데, 황태와 멸치를 우린 국물에 직접 뽑은 면을 삶아 말고 그 위에 부추는 조금, 숙주와 버섯은 수북히 쌓아준다. 진한 국물이 너무 맛있다. 술 안먹어도 해장되는 깊은 맛이 있고, 함께 나오는 양념장을 풀면 매콤한 맛이 은은하게 우러나와 한 그릇을 금세 비우게 된다. 맛이 있고 가격도 저렴해서 늘 사람이 많은 데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요리를 시작하기 때문에 대기 시간도 길다. 시간대를 잘못 맞춰가면 한참 기다려야 한다. 학교 산책 후 가면 운 좋을 땐 한 두 테이블이 비어있고 어떨 땐 좀 기다려야 하지만, 나는 상담을 받고 나서는 꼭 이 칼국수 집에 간다. 김치를 몇 번이나 더 덜어서 가져와 호로록 호로록 칼국수 면발을 모두 건져먹는다. 여기서 칼국수를 먹고 나면 텅텅 소리 나던 빈 마음이 다시 따뜻해지는 기분이 든다. 


배부른 배를 앞세워 다음으로 가는 곳은 비로소 커피다. 걸어서 1분 걸릴까 말까. 칼국수 집에서 그대로 걸어 내려오면 있는 카페다. 살짝 주황빛이 도는 밝은 벽돌로 된 주택을 개조해서 1,2층을 카페로 사용하는 것 같다.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걸어나오면 그때부터 산책길은 출근길로 바뀐다. 이촌에 있는 작업실로 출근하려면 6호선을 타야하는데, 보통날은 대흥역에서 지하철을 타지만 금요일은 그대로 경의선 숲길을 따라 공덕역까지 쭉 걷는다. 아주 더운 여름이 지나고 나서야 시작된 새로운 출근길이지만, 요즘의 낙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점심시간에 대흥-공덕 구간을 걷는데,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많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들도 많고, 유모차를 끌고 나와 아이들과 산책하는 보호자도 많고, 그냥 걷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많다. 이 길이 없을 땐 다들 어디서 시간을 보냈을지 잘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은 편안해 보인다. 이 숲길은 이사오고 반년간 꽤 많이 걸은 길인데도 지겹지 않다. 나무도 사람도 하루하루 같은 날이 없었기 때문일 거다. 


아메리카노를 반정도 마시고 나면 공덕역에 도착한다. 4호선 환승을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열차에 타고, 갈아타고 이촌역에 내려 또 걷는다. 나오자마자 용강 중학교, 신용산 초등학교가 어서 또 한바탕 운동장의 중학생들과 하교하는 초등학생들을 구경한다. 아직 컵볶이도 있고, 간간히 뽑기 아저씨도 볼 수 있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느리게 움직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작업실까지 걷는다. 


작업실에서 일하고, 퇴근하고 나면 오늘 하루는 이것만으로도 꽉 차서 뿌듯하다. 상담도 받고, 산책도 하고, 일도 했다. 더 무얼 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자책감도 들지 않고, 하나하나 일을 수행하면서도 마음이 편하다. 내 에너지 크기와 흐름에 맞는 하루다. 루틴이라는 건 이런건가 보다. 월화수목토일도 금요일 같으면 참 좋을텐데. 최근 화요일-토요일 오전에 필라테스를 시작한 것도, 아마 금요일의 루틴이 주는 안정감을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일을 꾸준히 반복하고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편할 수 있다는 걸 요즘에야 깨닫는다. 루틴(일정한 행동의 반복)은 무조건 지겹고 재미없는 거라 여기던 젊은 날의 나를 반성한다. 지난날의 하루는 내가 짠 루틴이 아니었기 때문일거다. 나의 지겨움 주기와, 나의 에너지 크기와, 내가 좋아하는 것-아마도 사람구경인 것 같다, 요즘 나의 좋아하는 일은-을 잘 알아야 루틴도 즐거울 수 있다. 나는 요즘 나를 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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