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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Oct 17. 2019

휴일이 뭐 이래

자취일기_11

오늘은 갑자기 쉬게 되었다. 작업실 아파트단지가 물탱크 청소를 한다며 갑자기 어젯밤 아홉시쯤 내일은 쉬라고 연락을 주셔서-선생님도 그때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하셨다-아침부터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어제 미리 씻어놓은 채소로 샐러드도 만들어 먹고, 커피도 정성들여 내려 마셨는데 여전히 기분이 별로였다.     


 

돈을 쓰면 좀 기분이 좋아질까 싶어, 며칠 안남은 남자친구 생일선물을 뒤지다가, 떨어진 파운데이션 생각도 나서, 뭘 사면 좋을까 고르다가. 9월 말부터 돈을 막 썼던 것 같아서, 사실 막쓴 것도 아니다. 9월엔 필라테스 주2회 6주 수강료를 일시불로 지불했고, 만난지 2주년 기념으로 남자친구와 반지를 샀다. 아무튼 의미있는 일에 돈을 썼는데도 평소에 돈을 워낙 안쓰고 살다보니 돈을 평소보다 '많이' 쓴 사실이 자꾸 의식됐다.

 


돈을 꽤 많이 썼다는 사실에 쫄려서, 보고 있던 입생로랑 올아워쿠션 창을 꺼버리고, 저렴이 팩트를 검색했다. 한창 검색을 하다가 무슨 갑자기 난데없이 파운데이션이야. 시간이 많아지니 역시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며 폰화면을 꺼버렸다. 돈을 쓰려고 마음먹으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별로 없어서 뭐든지 자꾸 끄게 된다. 사고 싶은 책을 장바구니에 담아놓기만 하고, 안 읽은 책이 수두룩하다며 또 구매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소비에 명분이 쌓이길 기다리는 내가 구차스럽다.      



동백이도 보고, 단오도 보고, 연애의 참견도 보고. 즐겨보는 드라마 예능 다 챙겨봤는데도.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하고 싶은 게 없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갑갑하고 무서웠다. 할 수 있는게 없다. 영화를 보는 일도 재밌지 않고, 책을 읽는 일도 즐겁지 않다. 모든 일이 부담스럽다.      



쓸 수 있는 돈이 적어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생각이 강해진걸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게 우울하다면 그냥 입생로랑 팩트를 사고, 남자친구 선물도 지르면 그만인데. 사면 굶어죽는 것도 아니고, 질러도 사실 상관없는데. 근데 또 굳이 그걸 산다고 행복할까.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왜 나조차 모르는걸까. 어찌해야 할지 몰라 일단 보일러 온수 버튼을 누르고 급하게 탈의한 뒤 샤워기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만히 있다가 한밤중이 되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았다. 저녁 다섯시 반이 넘어,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고 나왔다. 집 앞 국수가게에서 국수를 주문하고 나니, 엄청 크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 더 배고파지기전에 나와서 다행이다. 계산을 하고 나와 근처 올리브영 두 군데를 가보았다. 내가 검색한 저렴이 팩트는 다 나갔다고 한다. 두 군데 모두 베이지21호는 없단다. 


     

일단 이번주 분량의 브런치에 올릴 글을 쓰지 못해서 스타벅스에 들어왔다. 자몽 피지오를 시키고 이런 글이나 쓰고 앉아 있다. 친구에게 사는게 지루하고 무료하다고 톡을 보내니, 쇼핑을 하라고 한다. 기분이 좋아질 거라며. 쇼핑을 ‘못’해서 사는게 지루한 것 같은데. ‘적은 돈 확실한 행복’을 보장하는 소비를 하자니 나는 여태껏 그런 확실한 것들을 많이 찾아놓지 못했고, 그렇다고 많은 돈을 들여 뭔가 사자니 그 정도로 확실히 원하는 건 또 없는 것 같아. 그래서 이도저도 사지 못하고 헤매는데.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사고 싶은 것도 모른 채 하루가 지나간다. 자몽 피지오는 좋아해서 다행이야. 뭐라도 써야겠다고 노트북을 챙겨들고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다행이지만, 여전히 나는 기분이 별로다. 왜인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이제 겨우 저녁 8시도 안되었다는 것도 힘들다. 오늘 휴일은 하루종일 너무 길다. 부디 오늘을 무사히 잘 넘기고, 내일은 바빴으면 좋겠다. 나는 왜 이모양일까. 왜 이렇게 살까는 생각은 이 글을 올리고 나면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러게 왜  LG는 플레이오프도 못가고 떨어져가지고, 이 저녁에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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