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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자취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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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Oct 08. 2019

놓여 있던 것. 내가 놓는 것.  

자취일기_10

    

근 5개월 동안 바꾼 적 없던 가구배치를 바꾸었다. 가구들이 있던 자리 아래에는 먼지와 머리카락이 가득했다. 콜록콜록 연신 기침을 하면서 전선을 정리했다. 그동안 모아놓은 빵 끈들이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드라마에서처럼 연인의 손가락 치수를 재기 위해 쓰진 못했지만. 금색의 빤딱빤딱한 이 철사로 길게 늘어지는 공유기의 전선을 묶었다. 모으면서도 쓸 일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쓸모가 있었다. 아마 이 방을 나갈 때까지 쓸 일이 없었다고 해도, 나는 계속 모았을 것이다. 작은 힘만으로도 내 맘대로 구부릴 수 있는 그런 쉬운 게 세상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소파 뒤로 벽이 오게 했다. 엉덩이를 깊숙이 넣기에는 등 쪽 쿠션이 팽팽하게 튀어나와있고, 엉덩이를 앞으로 빼고 앉기에는 금방 미끄러지는, 어떻게 앉아도 불편한 이 2인용 소파(라고 쓰여 있었지만 앉아보면 꼭 1인용인)를 공간분리 용도로 썼었는데, 앉아 있으면 목과 어깨가 공중에 떠 있어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벽에라도 머리를 기댈 수 있으면 조금 편할까 싶어 일단 벽에 붙였다.      



모니터 책상 위로 올렸다. 그동안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던 책상을, 원래 위치 그대로 두고, 용도만 모니터 거치대로 바꾼 것이다. 원래 모니터는 침대 발끝 옆 빈틈에 소파테이블을 밀어넣고 그 위에 얹어놓았는데, 덕분에(?) 누워서 넷플릭스나 푹(웨이브로 이름 바뀌었더라)을 보며, 무엇이든 침대 위에서 처리하는 와식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빈지와칭을 즐겨하는 카우치 포테이토에겐 최적이었지만, 몇 달을 이렇게 살다보니 목부터 허리까지 온갖 근육들은 뒤틀렸고 이들은 영 제자리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런 연유로 일단 모니터의 위치를 바꿔보자는 마음에서 가구재배치를 시작한 것이었다. 주목적은 모니터 시청과 잠자리를 분리하는 것.        



침대에서는 잠만 자려고 며칠째 노력중인데, 며칠 지내보니 소파에서도 침대에서도 방 어디에서도 모니터 화면 보기가 불편해진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피어오른다. 허무한듸....인생..(왜 그렇게 애를 써가며 배치를 바꿨나..)      



허무하지만 가구재배치를 하며 어떤 보람을 느꼈다. 재배치를 하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부엌과 생활공간의 분리(원래 배치)인지, 수면과 생활공간의 분리(새로운 배치)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불명확하던 나의 요구를 알게 되었고, 그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헝클어져있던 전선을 정리하고, 소파를 돌리고, 모니터를 책상 위로 올렸다. 스스로에게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오로지 ‘나’를 위해 이래저래 무언가 움직일 수 있다니.      



추석 즈음부터 거대한 문제 앞에서 무력감에 휘둘렸었다. 어떻게 하면 주거형태를 전세로 돌릴 수 있을까. 내 집이라는 건 영영 생기지 않을 것 같고, 하고 싶은 것도 즐거운 일도 전혀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조금이나마 내맘대로 하는 일의 즐거움을 느꼈나보다. 가구배치를 바꾼 다음날, 필라테스 일일체험을 하고 등록했으니까. 가봤자, 해봤자 하며 미루던 일들을 일단은 시작해본 것이다. 잊었던 ‘내맘대로’의 기쁨을 가구를 재배치하며 적지 않게 느꼈던 건 아닐까. 며칠이나 갈 수 있을지 두렵지만. 가능하면 앞으로도 쭉 내 방에서만큼은 내가 제 1세계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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