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써 드립니다.
어느 날, 샤워하고 수건 수납장을 열었는데 맨 윗칸에 올려놓았던 수건이 한 칸 아래로 옮겨져있는 걸 발견한거야. 살짝 이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옮겨진 수건 한 장을 꺼내 썼어. 며칠이 지났던 어느 날. 열린 화장실 문틈 사이로 윗칸에 수건들을 아랫칸으로 옮겨놓고 있는 네 뒷모습을 본거야. 키가 작은 내가 까치발을 해서 가장 윗칸까지 수건을 올리고 내려야한다는 걸 보았는지, 아니면 아랫칸부터 없어지는 수건을 보고 불편했겠다 생각을 했는지. 왜 네가 수건을 옮겨놓았는지 정확한 이유는 사실 알 수 없어.
어떤 계기에서였는진 모르지만, 그냥 네가 반듯하게 접힌 수건을 하나하나 집어 느릿느릿 아랫칸으로 옮기고 있는 뒷모습을 보고 있는게 좋았어. 안으로 굽은 너의 좁은 어깨부터 수건을 집는 통통한 손가락까지 나도 느릿느릿 말없이 쳐다봤어. 얘기한 적 없었는데. 내가 까치발을 들어야 하는 순간들은 집안을 꾸리는 곳곳의 과정에 당연하다는 듯 녹아들어 있었고, 나는 이제 익숙해져서 딱히 불편하다고 생각도 못하고 있었지. 그러다 너의 뒷모습을 보고는 사실 그 수건수납장이 나에겐 꽤나 높은, 불편한 수납장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 너는 매번 그렇게 수납장의 빈 가운데 칸을 보면, 맨 윗칸의 수건들을 옮겨놓고 있었던거야. 나보다 한참이나 크니까 너에겐 윗칸의 수건이 불편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옮겨놨다고 나에게 굳이 말하지 않고, 나 역시 네가 수건을 옮긴 일을 콕 찝어서 고맙다고 말한 적도 없지만,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어. 내가 말하지 않은 나의 불편함을 네가 먼저 알아봐주어서. 웃기지. 나는 그런데서 사랑을 느낄 줄은 몰랐어. 정말이지. 수건 수납이 우리 관계를 더욱 튼튼하게 하다니.
정확하게 말하고, 요구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는 걸 알아. 말하지 않고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어리광 피우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알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누군가 나를 위해 ‘어련히 알아서 해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 서운해하면 안된다는 것도. 사람들을 좋아하고 상처받고 또 다시 좋아하면서 배웠어. 그런데 그날 뒷모습에, 그동안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상처 받았던 마음이 조금, 쪼끔, 눈꼽만큼 치유되었다고 하면 오버일까. 다들 내 맘같지 않다고 이불 속에 웅크려 ‘서운해하지 말아야지’ 되뇌였던 수많은 밤이 조금은 치유되는 기분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매장마다 맞는 옷 사이즈가 없고, 너무 큰 덩치에 싱글 매트리스가 비좁고, 너무 무거운 네 팔과 맞지 않는 높이 때문에 길을 걸으며 어깨동무는 꿈도 못꾸지만, 그래서 또 그런대로 나는 내가 가닿지 못하던 높이의 세상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 서울의 인도에도 거미줄이 많다는 건 네 덕분에 알게 됐잖아. 내 얼굴이 지나다니는 높이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니까 거미줄이 없는 거였다는 거. 네 얼굴의 높이에는 거미들이 열심히 친 줄이 잘 유지된다는 것. 넌 서울에서도 길 걷다가 거미줄을 많이 먹어봤다고 했잖아. 거미와 너의 적대관계에 대해 알게 된 날. 내 세상도 조금은 높아졌을거야. 너 역시 적어도 수납장의 한 칸만큼은 낮은 세상을 볼 수 있겠지.
무심한 듯, 우리가 서로에 대해 잘잘못을 따진다거나, 대단한 고마움을 구구절절히 표현한다거나 하진 못해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높이에 대해 짐작해나갈 수 있다는 것. 나는 그게 좋아. 수도 없이 조율해야 할 많은 너와 나의 다름이 어떠한 침묵의 이유도 되지 못한다는게. 또 때로는 번역되지 않는 불편의 침묵 속에서도 서로의 윤곽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 나는 그게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