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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Dec 17. 2019

노래도 못하고 그림도 못그리지만 03

읽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써 드립니다. 

저는 정말 쫄보인데가끔 눈을 질끈 감고 용기를 내서 인생을 바꾼 경험이 있습니다블블님이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를 내본 순간이 궁금해요!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나를 전담해서 가르치던 파트너는 늘 날 놀렸다.      

“쫄보”     



우유 스팀을 낼 때마다 고온의 증기에 굉장히 겁을 냈기 때문이다. 거품을 낸 뒤에는 우유가 말라붙지 않도록 한번씩 증기를 빼주고 금속노즐을 마른 행주로 닦아줘야 했는데, 그 때마다 나는 늘 나무늘보가 되곤 했다. 너무 무서워서 그 모든 과정을 매우 천천히 진행했기 때문이다. 항상 ‘헙!’ 기합이 필요했다. 치이이이이이익-. 레바를 돌리면 맞닥뜨리는 소리는 예상대로 위협적이었다. 한껏 움츠린 어깨를 보고 선임 파트너들이 항상 고개를 절레절레 했다.       



뜨거운 것과 접촉할 때는 늘 용기가 필요했다. 내가 낸 용기는 이렇게 사소하다. 그저 시간이 흘러 조금 식은 다음이면 더 이상 내야 할 필요 없는 용기였다.      



큰 용기를 낸 기억이 없다. 나는 언제나 비겁했고, 뒤로 숨었다. 혹은 눈에 띄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이 정도 선이라면 그리 욕먹지 않을 거야.’ 라는 확신이 들 때에만 발언했다. 거기까지였다. 누군가의 비난을 받을 정도라 생각되면 거기서 멈췄다. 개인적으로도 먼저 나를 열어 제껴 본 경험도 없다. 거절당하는 두려움의 구렁텅이 속에 날 집어던지고 싶지 않았다. 관계의 열쇠는 항상 상대방에게 먼저 건네주었으며, 자율적으로 복속되면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꼈다.       



운이 좋았다. 개인의 존엄을 잃지 않는 선에서 타협하며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크게 나를 구겨 넣지 않아도, 제 살점을 떼내지 않아도 무리없이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이라는 테두리 안쪽에 위치해있었다. 서울에 집 한 채는 장만한 모부의 밑에서 자랐고, 시스젠더 이성애자로서 살았다. 장애 없이 지냈고, 아직 늙지 않았다. 대체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적당히 비겁하게 살면서도 나를 속이지 않을 수 있었다. 용기를 낸 기억보다는 도망간 기억들이 더 많이 떠오른다. 책임지지 않는 방임, 갈등을 회피하는 도망.      



운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생존과 존엄이 걸린 용기를 생각한다. 용기를 내고 처형장에 올려지거나, 혹은 용기내지 않은 자신을 더 이상 영원히 사랑할 수 없게 되거나. 둘 중하나만 선택이 가능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 특별히 무언가를 잘못하지 않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단지 운이 나빠서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용기’와 한평생 싸워야 한다. 자신을 속이며 테두리 안에서 말라가거나 자신을 지키다 세상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거나.      



누구나 용기 내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쫄보는 쫄보 본연의 모습 그대로 살아도 누군가에게 비난받지 않는 사회. 압박 속에 용기라는 결단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사회.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갈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사회를 원한다. 이미 미움 받는데 왜 또 용기가 필요한 일일까. 누구나 도망가고 싶으면 도망갈 수 있는, 용기를 강요당하지 않는 사회로 발전해나갔으면 좋겠다.



용기를 내서 인생을 바꾼 경험에서 스릴이나 서스펜스를 느끼고 싶지 않다. 무심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길 바란다. 장르라면 긴장 없이 설렐 수 있는 로맨스이길 바란다. 그저 스팀 머신 앞에 선 나처럼, 뜨거운 무언가를 움켜잡기 전의 한순간의 기합이면 충분하다. 뜨거운 기운이 적당히 식으면 굳이 더 이상 낼 필요가 없어지는 용기이길 바란다. 힘들게 낸 용기가 거절당한다 하더라도, 누구나 받는 상처는 그저 차갑게 식은 커피 정도의 씁쓸함이길.       



내게 용기의 순간을 물은 당신의 용기도, 스릴러가 아니고 로맨스이길. 생에 큰 용기를 내 본적 없는 비겁하고도 운좋은 사람의 변명이 길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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