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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블 Jun 04. 2016

난 눈이 높지 않아

내 사전 속에서는

 소싯적 가장 많이 받았던 오해는 ‘눈이 높다’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각종 볼매남을 선호하는 영원한 마이너리거인데. 왜 때문이죠? 스스로 정말 눈이 높은가에 대하여  쓸데없이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점이 있었다. 이십대 초반부였겠지.


 “야 이 사람 어때, 이사람” 그 때 즈음, 친구가 소개팅을 하라며 톡으로 사진을 전송해준 일이 있었다.

나는 “멀쩡하네”라고 대답했다.

 “뭐라고? 야 완전 훈훈하구만! 이러니까 연애를 못하지”


박소담 정도는 되야 멀쩡한겁니까.



친구의 대답에서  정말 연애 못하는 이유를 단번에 깨쳤다. 물론 내가 눈이 높다.....,는 것을 깨달은 건 아니고 친구와 내가 서로 완전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사용하는 ‘멀쩡하다’는 잘생겼다. 준수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성격이 베베 꼬여서 쉽게 잘생김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태도가 그대로 반영됐달까. 하지만 누군가가 듣기에 그 말은 ‘잘생기진 않았네’라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뭐라. 지금 네 얼굴에 이 사람이 잘 생기지 않았다고?



내 ‘멀쩡하다’는 말을 들은 사람은 나에게 ‘눈이 높다’라고 말한다. 나는 다시 기준이 특이하거나 예민하긴 해도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상대방이 내게 말한다. “그게 눈이 높은거야” 내가 사용하는 ‘눈이 높다’는 외모를 한정해서 쓰는 단어지만 또 다른 이에겐 전반적인 캐릭터를 평가할 때까지도 사용되는 말인 것이다.


 결국 내가 눈이 높다는 오해는  언어 사용 때문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각자가 사용하는 '멀쩡하다'와 '눈이 높다'가 사실은 제각기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로 치면 난 눈이 높지 않고 웬만하면 잘생겼다 표현하는 축이다. 하지만 친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라면 나는 엥간히 잘생기지 않으면 잘생겼다 인정하지 않으며 얼굴 뿐만 아니라 성격과 취향 삶을 대하는 태도까지 따지는 엄청 깐깐한 아이이다. 결국 나는 보는 사람에 따라 눈이 높을수도, 낮을 수도 있는 거였다. 더 오래 살면서 나와 같은 의미로 두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현저히 적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 때 나의 미지근한 반응으로 소개팅은 물건너갔다. 보자마자 “와 훈내나 나 나갈래”하는 친구들이 항상 단체창에 같이 있었으므로.


눈이 높아서가 아니라 세상사람과 다른 언어사용이 연애를 못하는 진짜 이유였던 것이다. 라고 믿고싶다.


다 같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저마다의 삶에서 만들어진 각자만의 사전을 활용한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는 건 아닐까.



 단어의 사용에는 그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 자라온 환경, 만나온 모든 사람들과 생의 순간들이 작용한다. 각자가 떠올리고 사용하는 단어들로 보편성을 찾을 순 있겠지만 100% 일치하는 단어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나무를 누가 그려낼 수 있겠어.



고군이 강양과 먹었다는 속초여행 부꾸미


 ‘부꾸미’를 떠올리면 난 어릴 적 할머니의 뒷모습이 떠오르지만, 누군가는 속초 여행길 재래 시장에서 요기했던 부꾸미의 따뜻함을 떠올릴 것이다. 둘 다 따뜻할 순 있겠지만 같은 온도는 아닐 것이다. 단어마다 적힌 다른 추억과 경험들을 가지고서 우리는 대화한다.



 결국은 오랜 시간을 거치는 수 밖에 없다. 나의 ‘멀쩡하다’가 어느 정도의 준수함을 포함하는 것인지는 남자 100명 정도는 함께 이야기해봐야 알 수 있다. 그 정도의 끈기를 가지고 나와 남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라면 대환영이다. 각자의 추억과 온도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탐색할 때, 그 때 우리는 아마 서로의 ‘멀쩡하다’와 ‘눈이 높다’ ‘부꾸미’ 같은 것들을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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