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 떠난 우리의 낭만-2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by 연은미 작가



만화 그리겠다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무작정 짐을 쌌을 때, 아빠는 회사가 야간 주여서 잠도 많이 못 주무시고 늦은 아침에 집을 나서는 나를 바래다주었다. 바래다주었다는 표현은 너무 가볍다. 울산에서 서울 우이동까지 이삿짐 차량 옆자리에 앉아 장장 여섯 시간을 걸려 동행해 주셨으니 말이다. 나는 룸메이트 언니랑 편하게 우등고속을 타고 올라왔다. 짐을 어찌나 바리바리 쌌는지, 작은 TV에 책상이 두 개, 책, 잡화, 그림도구까지 짐을 꼼꼼하게 챙겼다. 그렇게 1997년 무더운 8월, 울산을 떠나 서울 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 우이동 끝자락. 그곳을 다시 찾았다.


와, 그대로다!

구석이긴 하지만 오래된 1층 건물이라 진작에 헐리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변한 게 없다. 담장 안에 나무가 좀 더 무성해졌다는 정도일까. 그때만 해도 부동산이 아니라 벼룩시장 광고지를 보고 방을 많이 구했다. 몇 달 전 J 언니와 나는 광고지에 방이 두 개라고 해서 보러 갔는데 방 하나는 사람이 누워서 다리를 뻗기도 힘든 코딱지만 한 정사각형 사이즈였다. 그래도 서울 방값이 얼마나 비싼지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계약을 했다. 방 구하는 며칠 동안 요상한 모양의 집을 많이 봐서 반 지하로 안 들어가는 게 고맙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빠는 울산에서 실어온 가구, 물건들을 옮겨주시고 금세 일어나셨다. 아빠의 뒷모습이 아련하고 슬펐는데 아빠도 버스를 타고 가면서 엄청 우셨다고 했다. 밖에 서서 대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집 앞 정류장에서 아빠를 보냈던 장면이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일돌과 사귀고 처음 내 자취방에 놀러 왔던 날도 잊을 수 없다. 지대한 공을 세운 건 울산에서 크리스마스에 나를 보러온 절친 미숙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에 셋이 만나 잘 놀고 미숙이가 내 자취방에서 잤다. 미숙이 내 남친을 아주 괜찮게 보았는지 다음날 집으로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자고 바람을 넣었다.

"원래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려면 주변 사람을 공략해야 돼." 일돌남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일돌은 친구가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처음부터 내 친구를 공략할 생각으로 친구 것까지 선물을 준비했다고 했다. 치밀한 남자 같으니라고. 암튼 미숙씨는 고마운 친구라고, 덕분에 우리의 연애는 한 단계 진전을 하게 되었다고 그날의 에피소드를 깔깔대며 회상했다.


집 앞 도로 맞은편에 수시로 다녔던 꽤 넓었던 비디오 대여점은 반으로 갈라져 다른 업종이 들어와 있었다. 장소 한 곳 한 곳을 돌아볼 때마다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버스로 화실에 출,퇴근을 하고 장을 보고 일돌과 데이트를 하는 모습들. 과거 여행을 하는 영화처럼 멀찍이 선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몇 년 후 네 모습이 이럴 거야. 미래를 알려주고 싶지만 절대 개입할 수 없다. 그저 타인을 보듯 바라보는 것 밖에.


한낮의 짧은 여행이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 시절 얘기를 하면서 그리워했다. 책을 읽고 서평을 하면서 읽었던 내용을 정리하고 되새기는 것처럼 내 삶의 터닝포인트가 된 서울생활과 남편과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곳을 돌아보니 마음이 짠하고 몽글해졌다. 그러고 책상 앞에 앉으니 <나는 사슴이다> 마지막 완결편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마리아와 마린 남매를 잘 떠나보내고 싶었다. 작업을 하며 힘들 때도 많았지만 그들의 감성에 취하며 6년동안 참 행복했다. 결혼을 하는 주인공 마리아를 축복하며 열혈 작업을 하던 중 신기하게 내 뱃속에도 아이가 찾아왔다. 운명인가. 내 작품 주인공들이 다음 삶으로 내딛는 시점과 내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 들어가다니.


서울에 처음 와서 지낸 8월의 뜨거운 날이 지나고 7년 뒤 다시 찾아 그리워했던 6월의 이글거리던 날도 지나가고 수년의 여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추억은 카메라 렌즈로 그 순간을 찰칵 찍어 마음에 저장하는 것이 아닐까. 그 뒤로 둘에서 셋이 되고 셋에서 넷이 되는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장면이 카메라 렌즈에 찍혀 가슴 속 앨범에 차곡차곡 저장되었다. 이미 까마득해진 추억여행을 떠올리니 지금 내 옆에 있는 것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올해 보는 꽃은 작년의 꽃이 아니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람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겠다. 우연도 계속되면 필연이라고, 필연적인 우연히 겹쳐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귀하게 여기고 나 자신도 소중히 아끼며 살아가야겠다.


지금 내가 보내는 당연한 일상을 그리워하며 발걸음을 하게 될 미래의 나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주고 싶다.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는 일요일 아침이 벅차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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