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 차 안 가지고 버스 타고 다니잖아. 정류장에서 내리면 백반집이 하나 있는데 가격이 착하고 맛있어. 거기서 먹고 도서관 올라가는 길이 예술이야. 이거 또 내 아끼는 로드맵을 공개해야 하나?
맛있는 백반집이라는 말에 혹해 옷만 대충 걸치고 집을 나섰다. 급히 나오느라 핸드폰 배터리가 10프로인데 배터리도 못 챙겼다. 3번 버스를 타고 가다 춘의아파트 앞에서 내린다. 한 번도 안 와본 동네다. 깔끔하고 소박한 식당에 들어가 오늘의 백반 정식을 주문한다. 메인요리인 명태 무조림과 콩나물 뭇국, 간단한 밑반찬이 나온다. 깔끔하고 소박하다. 반과 반찬과 국까지 거의 싹 다 먹을 정도로 적당한 양을 담았다. 소희가 밥값을 내어서 미야는 편의점에서 따끈한 커피를 산다. 2+1이다.
희는 원미도서관 가는 길을 안내한다. 넓고 얕은 오르막길이 보인다. 차가 다니지 않은 한적한 길을 따스한 봄햇살을 맞으며 걷는다. 이번주 미야는 2주에 한 번 있는 역사독서모임이라 태백산맥 8권과 이슬아 작가의 책을 챙겨서 왔다.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릴까 하다 그만두었다. 오랜만에 몇 시간 독서만 하자. 그동안 짬독서만 겨우 하고 길게 읽지 못했다. 각자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독서삼매경에 빠진다. 지루할 때 나도 모르게 핸드폰에 손이 가는데 배터리가 별로 없으니 정신 홀릴 일이 없어 오히려 좋다. 책을 읽다 책 속 저자가 인상적으로 본 책이 궁금해 1층에 내려가 대출을 한다. 대출카드를 안 챙겨서 온라인 카드를 찍어야 하는데 3프로 남은 핸드폰은 절전모드라 바코드 인식이 잘 안 된다. 사서 선생님은 책상에 있는 충전기를 연결해 대출을 마무리해 주고 여분의 배터리를 하나 빌려주신다. 아, 안 주셔도 되는데 싶다가 전화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받아왔다. 도서관 실내로 다시 들어오며 주위를 둘러본다. 평일 오후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각자의 일을 한다. 내가 모르는 많은 일상과 직업들이 새삼 궁금해진다.
저녁이 되어갈 즈음 도서관을 나왔다. 도서관 가장자리에는 원미산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나 있다. 원미산은 내가 좋아하는 산이다. 희는 아직 원미산 끝까지 올라간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 어릴 때부터 자주 갔던 산이다.
어때? 올라갔다 갈까? 아침에 넌 뛰었다니 힘들면 말고. 희가 갑자기 말을 던진다.
힘들긴. 난 괜찮아. 올라가자. 나는 덥석 말을 낚는다.
도서관에 오는 것도 일정에 없었는데 갑자기 산을 오르게 되었다. 사실 원미산에 진달래가 피었는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원미산 둘레길을 따라 올라가서 정상과 반대인 둘레길 초입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길 옆으로 진달래 동산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양쪽으로 경사진 넓은 들판에 진달래가 피었다. 화사하게 만발하진 않았지만 군락을 이루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져 폰으로 진달래를 몇 장 찍는다. 충전해서 다행이다.
근데, 언니는 옷 어디서 사? 가성비 좋고 괜찮은 매장 없나? 나 월요일에 프로필 사진 찍어야 되는데...
내가 옷 많이 사봐서 아는데 유니클로가 가격 대비 질이 짱이야. 지금 가 볼래?
지금?
나는 이 즉흥적인 언니가 신기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인생 뭐 있어. 가고 싶으면 그냥 가는 거지. 난 인생이 즉흥이야.
우리는 버스 타려던 계획을 바꿔 7호선 지하철을 타고 두 코스에서 내려 롯데백화점 유니클로를 찾아간다. 그전에 가성비 괜찮다는 자라(ZARA)에도 들린다. 옷을 혼자 사러 가거나 남편과 갔어도 지인과 가는 건 무척 오랜만이다. 희는 미야를 척 보고도 사이즈를 골라주고 입어보고 맞지 않으면 번거롭게 들락날락하지 않도록 두 사이즈를 함께 안겨준다. 옷 몇 벌 사면서 이렇게 옷을 많이 입어본 건 또 처음이다. 가볍게 정오 12시 너머 나왔는데 시간을 보니 저녁 8시가 다 되어간다. 밖은 이미 깜깜하다. 쇼핑을 마무리할 즘 둘의 체력 배터리가 10프로 정도 남았다고 느낀다. 이제 짐가방을 들고 버스를 타고 집에 가야 되는구나 좀 피곤하다 싶었는데 희의 남편이 웬일인지 평소보다 일찍 퇴근 중이라고 전화가 온다.
자기, 그럼 데리러 와. 엄청 피곤해.
와, 오늘 우리, 전화 한 통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온 거야? 마무리까지 퍼펙트하네. 문자 한 통의 나비효과야!
그러게. 뭐가 될 때는 딱딱 맞아 들어가지. 오늘은 니 날인가 보다.
우리는 낄낄대며 괜히 하이파이브를 한다.
사람을 좋아하는 희 옆에는 항상 사람들이 넘쳤다. 아파트 근처를 함께 걸으면 꼭 한 두 명이 희에게 알은체를 했다. 관계가 많고 촘촘할수록 고민스러운 지점이 많아진다. 그 지점들을 통과하며 희는 몇 년 전 부산한 관계로부터 몸을 빼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요즘 희는 혼자서 운동하고 근처 식당에 들어가 혼자 밥 먹거나 갑자기 기분이 동하면 지하철을 타고 봉은사 절에 가서 조용하게 있다가 오기도 한다. 희의 즉흥성을 미야는 좋아한다. 같이 있으면 평소 무심코 넘기던 어떤 행위를 하게 된다. 희 덕분에 루틴에서 벗어나 변주곡을 연주한 날, 몸은 노곤했지만 정신은 산뜻하고 충만하게 차 오른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