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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은미 May 26. 2023

바람 같은 날을 살다가

엄마의 이름






불면증에 밤잠을 못 잔 지 십 년이 다 된 것 같다. 한 해가 다르게 몸이 약해지는 게 느껴진다. 수 십 포기 김장도 거뜬히 하던 젊은 날의 내가 지금은 김치를 사 먹고 설거지도 겨우 한다. 요리, 청소 등 살림하는 게 그렇게 재밌더니 지금은 만사 귀찮다. 겨우 몸을 일으켜 저녁거리를 사러 근처 시장에 갔다가 집에 오는데 집 안에서 사람 소리가 난다.

"할머니!"

문을 여니 조그만 아이가 내게 와서 폭 안긴다. 풋풋한 살냄새가 기분 좋다. 외손녀다. 가끔씩 예고 없이 방문해서 자기 집처럼 냉장고를 열어 꺼내먹고 TV를 보는 귀여운 내 강아지다. 내 눈엔 항상 아기 같은데 벌서 중학생이 되었다. 막내가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났았다.  젊을 때는 항상 날이 서 있어서 자식들이 예쁜 줄도 몰랐다. 손자, 손녀는 어찌나 예쁜지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서른둘, 나는 아이들을 두고 두 번째 인생을 시작했다. 그 후회와 회환의 세월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나는 행복할 자격이 있나?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아들이 방황하지 않고 잘 자랐을까? 너희들이 행복했을까? 부질없는 질문을 수천 번 했다. 친정을 통해 안 좋은 소식이 들릴 때마나 죄책감에 괴로웠다.  잠시 행복한 웃음을 짓다가도 내가 웃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수만 번 대뇌 었다.


상념과 눈물과 웃음을 휘휘 감아 돌아 시간이 속절없이 흐른다. 흐르는 세월에 잠시 발을 멈추고 보니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은 부천이다. 나는 부천에 산다. 그것도 딸들 근처에서. 이혼하고 부산에서 수십 년을 살았는데 예순이 다 되어서 다시 김포 근처 부천에서 살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가끔 딸들이 내 얼굴을 보며 외할머니를 닮았다고 할 때마다 깜짝 놀란다. 엄마를 닮았나? 거울을 본다. 얼굴에 새겨진 세월의 주름에 만감이 교차한다. 그리고 엄마를 떠올린다.

  '그렇지, 나의 엄마, 김향화.'


엄마는 팔십이 다 되어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막내 종희네와 살며 손녀, 손자 다 키우고 뒤치다꺼릴 다 하더니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다 다리가 부러져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돌아가셨다.

치매 초기에 웬일로 엄마는 부산에 사는 큰 딸네 가고 싶다고 하셨고, 종희가 엄마를 모시고 왔다.


서른다섯에 과부가 되어  평생 옹골지게 살아오셨는데 이제 몸도 마음도 다 쪼그라든 모습이었다.

그날, 챙겨드린 밥을 잡수시던 엄마가 갑자기 툭 뱉었던 한 마디를 잊을 수 없다.

"영숙아, 니 어릴 때 내가 왜 그리 모질게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엄만 나에게 왜 그렇게 아프게 했을까?

나는 왜 내 아이들을 아프게 했을까?


시간 속을 거닐다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다. 엄마는 세상에 없고 나는 할머니가 되었다. 시간이 바람처럼 지나 내 딸들은 엄마가 되고 그렇게 우리는 나이를 먹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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