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주었으나 미각을 가져갔다

어른이 되어 싫어진 것은

by 연은미 작가



짠내가 물씬 풍기는 바다에는 하얀 띠를 두른 파도가 해변을 향해 달리기 시합을 한다. 가장 앞에 있는 파도는 여유롭고 가장 먼 곳의 파도는 성이 난 듯 무섭게 따라붙는다. 사실 꼴찌를 할 것 같은 파도는 언뜻 하늘의 구름처럼 보인다. 하늘과 바다는 카멜레온처럼 같은 색으로 물들어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다. 해변에 도착한 파도는 스러지며 젖은 모래밭을 적시고 새까만 바위더미에 다다른다. 파도의 흐름을 따라가느라 내 호흡도 급해지다 점점 느려진다. 갑자기, 보색대비의 알록달록한 의자가 등장한다. 색색의 발랄함이 내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똑똑, 의자들이 동심에 노크를 한다.



어릴 적 가장 부러운 사람은 점방집 사장님이었다. 점방을 하면 저 맛있는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만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 과자는 그림자도 볼 수 없었지만 가뭄에 콩 나듯 라면땅 뽀빠이 과자를 손에 쥐었을 때 그 바삭바삭한 과자와 쥐똥만큼 들어있던 별사탕의 식감은 절묘한 궁합이었다. 당시 아이스크림이 백 원이었는데 백오십 원 하는 브라보콘이 출시됐다. 백 원짜리 아이스크림도 비싼데 백 오십 원이라고? 너무 비싸다. 그런데 먹고 싶다. 무슨 맛일가? 수없이 상상의 나래를 폈다. 처음 브라보콘을 먹던 날, 브라보콘의 하얀 껍질을 벗기니 초콜릿과 견과류 토핑이 되어 있는 머리가 드러났다. 한 입 베어 물으니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혀에 살살 녹았다. 행복했다. 아니 불행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행복하지만 먹으면서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원래 그대로였으면 좋겠다는 내 소망은 브라보콘보다 더 큰 300원짜리 월드콘과 빵빠레가 작게나마 달래주었다. 청소년이 되어서도 아이스크림은 여전히 맛있었다. 어느 날은 아이스크림을 먹다 혼자 먹기 뻘쭘해서 아빠한테 슬쩍 권했다.

"아빠,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아니, 됐다. 단거는 영 파이다!"

"니맛도 내 맛도 없는 걸 무슨 맛으로 먹노"


드실래요? 됐다. 너 먹어라


백투 더 퓨처

딸은 ABC 초콜릿을 한 자리에서 수북이 까서 먹는다. 청포도 사탕을 볼에 볼록하게 물고 행복해한다. 아이스크림은 바닐라를 좋아한다.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먹는 딸을 보면 참으로 궁금해져서 묻는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

"그럼, 당연하지, 엄마는 맛없어?"

"맛없어. 안타깝지만"

내가 그 옛날 아빠처럼 맛없다고 말하다니, 나한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언제부터였던가. 아이스크림 한 개를 한 번에 먹는 게 버거워진 것이. 사탕이 집에 있으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게 된 것이. 라면을 내 돈으로 거의 사지 않게 된 것이

어릴 때 나는 그게 자식을 위해 양보하는 건 줄 알았다. 어른이 되니 정말 맛이 없어졌다.


어른이 되고 얻은 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돈이고 잃은 건 미각이다.

나의 소원은 어른이 되어 돈 벌면 먹고 싶은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는 거였는데. 돈은 있는데 미각을 가져갔다. 어른이 되어서 재산을 군것질에 탕진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고차원적이 뜻이 아닐려나.



색색의 의자 뒤로 꼬마아이가 모래밭을 신나게 뛰어다닌다. 나 잡아봐라 호호거리며 잡힐 듯 말 듯 앞서가고 슬로모션으로 잡으로 가는 연인의 모습이 보인다. 색색의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는 노부부의 모습도 보인다. 노부부는 손을 꼭 잡고 함께 지나온 수많은 이야기를 바다에 토해내고 떠나간다. 처음의 알록달록한 의자는 점점 칠이 벗겨지고 소금기가 스며 퇴색되었다. 자연과 조금은 더 어울리는 모양새다. 워낙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의자라 수많은 사람들이 앉았다가 일어났다. 그들끼리 속삭인 이야기를 의자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알록달록 발랄한 의자는 오늘도 네 다리로 씩씩하게 서 있다. 내일은 어떤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나를 찾아올까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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