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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 내 그림들 내 미련들

행복했고 애틋했다. 고맙고 미안하다.

by BAEK Miyoung

(오늘 글을 유독 찡찡거림의 연속이 될 예정이니, 마음이 피로하신 분들은 이 글을 조용히 넘기기를 추천드립니다.)


요즘 다른 글을 쓰느라 통 정신이 없었다. 조금씩 끄적거린 건 3개월, 각을 잡고 쓰기 시작한 건 약 2개월이 넘은 듯하다. 물론 그를 머릿속에 그려둔 건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 일이다. 내용은 사실 별 것 없다. 2005년 애니메이션과 입학을 시작으로 올해까지, 20년간 10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온 작업기를 담담하게 써 내려간 글이다. 당연히 누가 기다리기에 쓴 글은 아니다. 임신으로 배가 불러옴에 따라 몸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도 유의미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일 외에는 없었다. 물론 글 쓰는 일이 재미있기도 했다. 일반 에세이 기준 책의 절반이 될 분량이 정리되었을 때, 예전부터 눈여겨봐온 출판사에 투고 메일을 보냈다. 지방을 거점으로 여러 창작자들의 소소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출판사의 성향이 내 글의 성향과 잘 맞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곳이 아니면 내 글을 쳐다볼 출판사는 없을 거라는 나약한 확신도 있었다. 투고 메일을 보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출판사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시작부터 끝까지 잘 여문 따뜻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답장이었지만, 결론은 출판이 어렵겠다는 거절이었다. 때로는 다정한 거절이 더 마음이 아플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답장을 받을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출판의 뜻은 접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쓰던 글을 끝까지 쓸 예정이다. 예상보다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어제는 계속 입이 썼다. 거절, 탈락, 제외- 냉정한 현실을 여태껏 한두 번 겪지 않았음에도 /어제의 거절/은 유독 아팠다. 어째서 악착같이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붙잡을 수 있는 면적은 계속해서 줄어드는 걸까. 어제의 거절은 내 글에 대한 거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애써온 시간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마음이 아팠다.


20년간 한 우물을 팠다. 10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럴싸한 장소에서 유학을 했고 학위를 땄다.


다른 사람 옆에 붙으면 꽤나 그럴싸한 수식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내 옆에만 붙으면 이도저도 아닌 무색무취가 된다. 단순히 이런 수식어들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더 이상 재미있지 않다는 사실을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탓일 수도 있다.

이런저런 우울한 마음이 겹쳐 요즘 나의 자기 효능감은 최저치에 이르렀다. 물론 현 상황에서 이런 투정은 이상하리만치 잘 통하지 않는다. 뱃속에서 아이를 키워내고 있는 것 만으로 내가 할 일은 충분히 다하고 있다고들 말한다. 뱃속 아이의 삶을 현실 세계로 이끌기 위해 나는 전적으로 아이의 조력자로 지내고 있다. 조력자의 역할로는 '나' 개인의 효능감이 발휘되기가 어렵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애니메이션 제작의 세계.

이 하나의 세계에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이 득의양양했던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더 이상 쏟아부을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이 세계에 어떻게든 잘 보이기 위해 아등바등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애를 쓸 수 없을 것 같다. 얼마 전 애니메이션 협회를 탈퇴했고 그들의 세계에서 한 발짜국 멀어질 연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10년 넘게 부둥켜안고 있던 몇 만장의 작화지와도 안녕을 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작화지들은 프랑스 유학을 정리하면서 기어코 한국까지 이고 지고 왔던 애니메이션 작업의 기록들이자 내 미련들이었다. 매번 이 종이 좀 처리할 수 없겠냐는 엄마의 청을 외면해 왔었다. 가지고만 있으면 언젠가는 빛을 볼 날이 오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으리라는 걸 이제는 안다. 이왕 내가 한국에 있으니, 이때에 이 녀석들을 보내주는 것이 서로 좋겠다 판단했다.

KakaoTalk_20250613_133859637_02.jpg 나의 미련들. 사진에 보이는 양 X3 이 더 있다.

정리에 도움을 주겠다는 엄마를 밀어내고, 나와 작화지 단 둘만 독대한 채 정리를 시작했다. 2007년에 만든 '감정, 그 날카로움'을 시작으로 2013년에 완성했던 '너무 소중했던, 당신'까지의 기록들이 저 종이들에 모두 담겨있다. 정말 아끼는 몇 묶음을 제외하고 모든 작화지를 버렸다. 집에 있는 작은 수레로 재활용 수거함까지 몇 번을 왕복해야 했다. 덕분에 오늘 관리실 아저씨가 매우 정신없셨을 걸 생각하면 죄송하기까지 하다.


내 시간과 노력이 담긴 그림들에게 안녕을 고한다. 덕분에 행복했고 즐거웠다. 더 빛나게 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항상 내 마음에 간직하고 있을게.


작화지를 뺀 서랍장이 휑해졌다. 어쩐지 내 마음도 휑하다. 앞으로 이 마음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우선은 남은 글을 마저 써야 할 것 같지만 아마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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