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첫 번째 애니메이션(1)

[감정_그 날카로움]

by BAEK Miyoung
시퀀스 01.gif

[감정_그 날카로움]

2007년/2'35"/2D 핸드 드로잉 기법


[감정_그 날카로움]은 2분 남짓의 짧은 작품이다. 휴학 후 심기일전으로 복학하여 만든 작품으로, 앞으로 이어질 오랜 드로잉 애니메이션 작업기의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다. 첫 작업이기에 서툰 점도 많고 테크닉적으로 부족한 지점도 많다. 그럼에도 ‘처음’이기에 나에게는 언제까지나 특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독특한 지점이라면 제목 그대로 '감정'에 있다. 내가 만든 작품들 속 무드는 대부분 둥글고 유한 편이다. 다루는 소재가 무겁고 어둡다고 해도 표현에 있어서는 대체로 부드럽게 그려냈다. 이 작품은 ‘분노’라는 원초적인 감정, 이래 봤자 학부생의 분노가 얼마나 날카롭겠냐마는, 어찌 되었건 일종의 인간의 어두운 감정에 초점이 맞춰 만들었다. 작품에 넘실대는 날 선 기운은 불안정한 연필선만큼이나 거칠거칠하다. 연필 끝에는 항상 심술이 가득했다. 뾰족한 감각들이 덕분에 그림을 그리던 당시가 꽤 선명하게 기억난다. 등장인물을 잔인하게 화면 밖으로 몰아내는 장면을 그릴 때에는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게 따가웠던, 그 서슬 퍼런 느낌. 이 경험이 썩 유쾌하게 남지 않았는지 이후로는 이만큼 날것 그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스무 살 언저리 내 마음을 파고 들어온 즉흥적이고 불안정했던 감정은 정교하지 않은 그림들과도 썩 잘 어울린다. 지금은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새파란 패기가 이 작품에 남아있다. 그래서 유독 이 작품을 보면 마음이 뭉근하게 고양된다. 작품의 내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음이다. 나는 이 작품을 만든 직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을 결정하고 앙굴렘에 있는 애니메이션 대학교에 입학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이 이후로도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의 부족함과, 치기 어린 마음, 일종의 희망과도 같은 가능성, 작은 성취, 거대한 창자자로서의 꿈. [감정_그 날카로움]에는 2007년의 뜨거운 겨울 자국이 선명한 열기로 남아있다.



시작하기에 앞서


어쩌다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잠깐 이야기하고 싶다. 그럴싸한 이야기까지는 아니지만 긴 여정의 시작을 그리기 전, 약간의 설명을 덧붙이는 일은 필요할 것 같다.


내 꿈은 만화가였다. 만화과에 가려던 길이 살짝 어긋나 애니과로 진학했다. 지금처럼 내가 원하는 '정보'가 뚝딱하고 나오지 않았던 시절의 아주 깜찍한 실수였다. 그때의 실수가 누군가 흔히 말하는 운명이었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곳은 흔한 시골의 농촌으로, 하천보다 약간 폭이 넓은 강을 두고 높지 않은 산과 들이 뻗어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부실해 3시간에 한번 올까 말까 하는 마을버스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매년 올해는 다리를 보강하여 마을버스를 들어오게 한다카더라 식의 무책임한 낭설이 오갔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살았던 15년 동안 버스 정류장은 들어서지 않았다. 1990년대가 지금 보면 아득히 먼 과거라 해도, 그만큼의 '시골'은 그 시절에도 흔하지 않았다. 여고 시절 내내 별명이 내가 살던 면의 이름일 정도였으니 말이다.(대동면에 살았기 때문에 내 별명은 '대동'이었다.) 농사를 생업으로 삼은 30여 가호가 옹기종기 살고 있는 마을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집은 우리집 뿐이었다. 수줍은 성격의 우리 가족이 이사를 온 첫날, 정돈되지 않아 각종 풀이 무성했던 주인 없는 마당에는 온 동네 꼬마들이 해맑게 뛰어놀고 있었다. 그들과 어색하게 조우했던 그날의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것이 마을의 첫인상이었다. 외지에서 온 우리를 향한 시골의 텃새는 아주 잠깐 존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숫기 없이 조용한 우리 가족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관심은 이내 뿔뿔이 흩어졌고 마을은 곧 잠잠해졌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집 앞에서 자라나는 벼만큼 나는 무럭무럭 자라났다. 자동차 소리보다 옆집 까치 우는 소리가 더 익숙했고 확연하게 바뀌는 논과 밭의 색깔로 계절의 변화를 알아갔다. 내가 만든 애니메이션의 배경과 색에는 그때의 감성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몇 없는 또래 친구들은 옆마을 혹은 옆옆 마을에 살았다. 어린이에게 옆마을이란 아득히 먼 곳인지라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혼자서 보냈다.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어린아이가 하기에 아주 쉬운 활동이자 나에게는 간단히 어른들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특기이기도 했다. 그림은 늘 가까이 머무는 친구처럼 곁에 존재했다. 그림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는 다짐을 한건 고2 초반이었다. 비장한 각오로 미술 학원을 찾아갔고, 다른 친구들보다는 늦은 미대 입시 준비생이 되었다. 2000년대 초반은 소묘나 수채화에 국한되어 있던 미대 입시의 전형적인 틀이 깨지고 학교별로 다채로운 입시 전형이 생겨나고 있었다. 서양학과, 디자인학과, 애니과에서 요구하는 입시 그림이 제각기 달라졌다. 저 먼 아랫동네 김해에서 이러한 변화를 기민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입시 정보는 제한적이었고 빠르게 변화하는 입시 미술을 가르칠 인력도 마땅히 없었다. 주변에 물어물어 부산 끄트머리까지 찾아 나선 후에야 내가 원하는 입시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미술 학원을 오고 가는데 근 4시간이 걸렸다. 지하철과 버스, 나달나달한 엄마의 금색 마티즈를 얻어 타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다행히 마티즈 정도는 드나들 수 있었기에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수도권 대학의 만화 애니메이션과를 가길 원했다. 그렇게 계원예대 애니메이션과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애니메이션과 =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함께 수학할 수 있는 곳이라는 대단한 착각을 했다. 당시에는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 정도만 바라보며 입시를 준비했기 때문에 학사 정보를 세세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탓이다. 대학에 입학한 순간부터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야 했다. 모든 수업이 애니메이션 관련 수업이었던 것이다.(당연하다.) 만화가가 되는 길은 아득히 멀어져 갔다.


세일러문, 천사소녀 네티, 웨딩피치 등 TV속 온갖 소녀 변신물을 좋아했다. 내 또래 대부분이 손꼽아 기다리던 디즈니 만화 동산은 주말 아침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렇다고 애니메이터를 꿈꾼 적은 없다.

매달 발간되는 윙크 밍크 소녀만화를 모았고 그 시대 인기 만화 작가들의 그림을 따라 그렸다. 그들처럼 달콤하고 서정적인 그림을 그리는 순정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언뜻 만화가에서 애니메이터로 옮겨진 꿈의 지형이 그리 드라마틱한 변화로 보이지는 않을 수 있다. 두 직업 모두 상상의 세계와 상상의 인물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점에 있어 꽤나 공통점도 많다. 하지만 생각만큼 두 장르 사이가 가깝다 장담하기는 어렵다. 기본적으로 만화는 책이라는, 지금은 웹툰이 대표적이기는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인쇄 매체로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사건과 이야기를 담은 절묘한 컷, 대사, 페이지 이동을 통한 작가의 연출이 표현의 주가 된다. 작가의 안내대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도 있지만, 독자는 자신이 원하는 페이지에 얼마든지 머무르며 이야기를 음미할 수도 있다. 그에 비해서 애니메이션은 ‘일정 시간’을 통해 감상하는 장르다. 스크린에 송출되는 그림과 이야기는 창작자가 부여한 시간을 따라 차례차례 진행된다. 관객은 작가의 안내를 통해 화면 속 이야기와 시공간을 체험한다.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관객은 일정한 집중과 인내를 강요받는다. 만화에 비해서는 수동적인 형태의 체험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이렇듯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창작은 언뜻 비슷해 보일지 모르나 창작의 과정 및 완성, 그리고 관객의 체험의 형태가 매우 다르다.


그러니 얼마나 당황스러웠던지!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과 자동차, 사투리 억양을 놀리는 사람들이 미웠던 갓 스무살의 나는, 그저 매일 광광 울고 싶은 마음으로 학교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내가 눈물 콧물을 흘리든 말든 현실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특히 대학 생활이 그러했다. 새롭게 익혀야 할 지식과 쳐내야 할 과제가 매주 산더미처럼 쌓였다. 당시 애니과의 최우선 과제는 고차원의 아티스트 양성이었다.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 감독을 배출해 내는 일이 학과의 목표였다. 학제 3년 중, 2년간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초 이론과 상식, 테크닉, 여러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방식과 연출론을 섭렵해야 했고 마지막 학년이 되면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들어 졸업 전시를 해야 했다. 모든 과정을 수행하기에 3년이라는 시간은 빠듯했고 학기별 강의들이 매우 타이트하게 설계되었다. 학업에 대한 평가와 비평도 엄혹한 편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 나는 매주 쏟아지는 과제와 가히 사투를 벌이며 전쟁 같은 첫 학기를 보냈다. 중간에 잠깐! 나는 만화를 배워야 하네 어쩌고 저쩌고 할 여력조차 없었다. 한주 한주 생존하는데 온 기력을 집중했다.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누구보다 빠르게 배우고 익혀나갔다. 물론 그 상황이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STOP 버튼을 누르고 주변을 살필 시간이 간절하게 필요했다. 결국 두 학기를 정신없이 마무리한 후 휴학계를 냈다. 그대로 멈춰 서서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재수를 해서 다른 전공을 찾아야 하는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1년의 시간을 가진 뒤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돌아온 데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