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_그 날카로움]
어떤 지식이든 손만 뻗으면 원하는 바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요즘이다. 굳이 대학까지 갈 것도 없이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볼 수도 관련 소프트웨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도 있다. 꼭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해도 자신만의 다양한 콘텐츠를 갖가지 형태로 만들어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제대로 모양을 갖춘 지식을 손에 넣기가 쉽지 않았다. 그에 있어 대학 입학은 가장 정석적이고 빠른 방법이었다. 물론 대학에 들어간들 내가 원하는 결괏값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인내가 필요했다. 엉뚱하게 애니과에 들어왔다지만 이왕 대학에 들어온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니메이션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에 일단은 무엇이 되었든 배우는데 집중했다. 쏟아지는 지식과 정보들을 닥치는 대로 손아귀에 집어 들었고 반쯤은 날것으로 삼켰다. 1년쯤 지났을 때 내가 배우는 학문의 기본적인 체계는 어느 정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해소되지 않는 의문 하나가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낯선 컴퓨터 프로그램들, 연출법, 애니메이션의 역사와 원리를 속성으로 배웠지만, 내가 아는 진짜 애니메이션이 완성되는 모습은 도통 확인할 길이 없었다. 마치 [코끼리]라는 환상 속 동물을 상상하기 위해 그의 코와 귀와 다리 등을 묘사하는 말을 열심히 들어보아도 도무지 전체 윤곽은 짐작하기 어려운 상황과 비슷했다. 나는 대체로 느긋한 편이지만 무언가 제동이 걸리면 더할 나위 없이 조급해진다. 나는 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실체를, 진짜 애니메이션이 완성되는 과정을 더 선명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
일정한 선을 긋는 일
휴학계를 냈던 1년간 여러 가지를 했지만 애니메이션에 대해, 그리고 내가 그를 상대하기 적절한 사람인지 탐구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가산 디지털단지에 있는 한 애니메이션 회사를 찾은 건 그 해 여름이었다. 애니메이션 원동화 작업에 도움을 줄, 혹은 배워보고 싶은 사람을 찾는다는 공고를 보고 찾아갔던 길이었다. 그런 전문 업체라면 어쩌면 내가 보고 싶었던 애니메이션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곳은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아닌 외부 제작사로부터 원동화를 주문받아 그리는 외주 업체였다. 인건비 이슈로 이런 종류의 일들이 점차 중국과 인도로 넘어가던 와중에도 해당 업체는 살아남아 기술자들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또 단단히 착각했던 것이다. 그곳은 애니메이션 제작의 일부만 다룰 뿐, 내가 원하는 애니메이션 제작의 전체 과정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예정에도 없던 원동화 하청 일을 하게 되었다. 내 첫 임무는 연필 선(Line)을 깨끗하게 긋는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된 선을 그어야만 돈이 되는 원동화 작업에 투입될 수 있다 했다. 여기서 제대로 된 선이란, 힘 있게 쭉 뻗어나가는 동시에 일정한 두께와 톤이 유지되는 기술적인 선을 뜻했다. 내 손은 기계가 아니므로 일정한 힘을 유지하며 선을 그려내기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선이란 정말 정직하기 짝이 없어서, 찰나의 망설임도 선 위에 고스란히 자국으로 남았다. 일정한 선 굵기를 유지하기 위해 세심한 힘 조절이 필요했다. 힘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결국 깨끗한 선을 긋기 위해서는 일정한 힘과 흐트러짐 없는 호흡, 지체 없는 과감함 필요했다. 어느 순간에는 이 일이 마치 수행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행히 선긋기의 원리를 금방 파악할 수 있었고 얼마 되지 않아 실무 일에 투입될 수 있었다.
그곳에는 5~6명의 많게는 몇십 년 동안 업계 일을 해온 베테랑들이 일하고 있었다. 선배들은 하루에 적어도 몇십 장에서 몇백 장의 원동화를 척척 처리해 나갔다. 작화 숫자가 곧 수입이므로, 그들의 하루 작업량이 그날의 급여가 되는 구조였다. 일한 만큼 돈을 벌고 기술은 있되 간섭은 없으니, 깔끔하고 매력적인 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나 같은 초보자는 아주 간단한 원동화를 맡아 그렸다. 내 첫 업무는 캐릭터가 두 팔을 들어 올리는 단순한 원동화 일로 장당 100원짜리 일이었다. 서툴다 보니 간단한 일임에도 여러 번 퇴짜를 맞았고 하루가 끝날 때쯤 겨우겨우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나는 비슷한 수준의 일을 맡아 그렸다. 회사 베테랑들은 나를 프로 작업자로 생각하기보다는 일을 배우러 온 귀여운 학생 정도로 생각했다. 나는 느리고 서툴렀지만 단 한 번도 부담이 될만한 말을 듣지 않았다. 되려 맡은 일을 잘 끝낼 때까지 선배들은 매번 끈기 있게 나를 기다려주었다. 베테랑이 서툰 초심자를 기다리는 건 생각보다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다. 그때 나와 일했던 베테랑들은 참 근사한 사람들이었다. 덕분에 주중 내내 회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다. 회사 앞 토스트 트럭에서 토스트를 하나 사들고 종일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일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어떤 때에는 이 일이 몸에 꼭 들어맞는 느낌도 들었다. 회사를 다닌 지 한 달을 되었을 무렵 애니과 내부에서 진행되는 산학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회사를 나왔다. 인턴처럼 일했던 터라 편하게 관둘 수 있었다. 학교를 나와봐야 이 일을 할 텐데 뭐 하러 학교에 돌아가냐 진심으로 묻는 선배도, 그냥 쭉 회사를 다녀서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하라 제안하는 선배도 있었다. 솔깃하긴 했지만 나는 좀 더 나아가보기로 했다. 한 달을 일하고 받은 수입은 9만 4천 원가량이었다. 약소한 금액이지만 내가 성실하게 그렸고 납품한 정직한 숫자였다. 9만 4천 원이면 아마도 900여 장 정도를 그렸다는 말이었다. 그 정도면 초보자가 한 달간 일한 것 치고 썩 나쁘지 않았다. 책상에 몸을 딱 붙이고 앉아 쌓여있는 종이 뭉치들을 처리하고, 사각거리는 연필선의 촉감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시간을 나는 진정 즐겼다. 이 회사를 통해 나는 내 적성과 속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 적은 돈을 번 경험이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여름의 가산디지털단지를 기억한다. 애니메이션 하청 업체들이 대부분 해외로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리고 그런 소식마저 이미 아득히 멀어졌을 때 나는 그때의 베테랑들을 생각했다. 페그바를 손에 쥐고 이게 내 밥줄이라 웃던 그분들은 자신들의 연필선을 간직하고 있을까. 여전히 넉넉한 마음씨로 후배들의 그림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분들을 여태 기억하는 사람이 이 자리에 남아 계속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사실을 그분들은 알고 있을까.
결국 그림이 좋다.
애니과에는 큰 강의실 하나를 통으로 비워 졸업 작품 제작실로 사용했다. 졸업 작품 제작실. 줄여서 졸작실. 3학년 학생들은 그곳에 틀어박혀 1년을 꼬박 보냈다. 당시만 하더라도 졸작실은 매우 엄. 근. 진한 공간이라 후배들은 함부로 들어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단, 선배를 돕는 졸작 도우미(스테프)들은 그곳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여름 이후 학과 내 여러 산학 프로젝트에서 투입되어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캐릭터를 개발, UI 디자인 프로젝트의 일원이 되어 현장감 있는 이런저런 일들을 탐색해 볼 수 있었다. 배우는 즐거움과 자신감을 얻었다. 교수님을 비롯 학과 선후배들과 공동의 일을 하면서 학과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학교를 다닐 때보다도 깊어졌다. 졸작 도우미가 되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쯤이었다. 졸업작품만큼 가장 가까이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의 전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또 없었다. 나는 그 길로 엄근진 졸작실로 소환되었다.
애니메이션은 집요한 노동을 필요로 한다. 인력과 시간이 넘쳐난들 늘 부족하기 짝이 없다. 졸업 작품 제작으로 고양이 손도 빌리고 싶은 선배들 앞에 제 발로 찾아온 무급여 도우미란, 굶주린 좀비 앞에 놓인 맛있는 먹잇감과도 같았다. 여러 졸작팀 중 한 팀을 선택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나에게 주어졌다. 선배들은 각자의 매력을 어필했다. 매일 밥을 사준다는 소소한 복지를 들이미는 팀부터 이미 국가 지원 사업 작품으로 선정되어 빵빵한 자본을 내세우는 팀까지, 매력도 다양했다. 이미 다른 도우미가 있어 내게 부과될 업무가 과하지 않으리라 조심스레 말하는 팀도 있었다. 그중 이도저도 없지만 작품을 하나는 끝내주게 재밌을 거라 장담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현재도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장승욱 감독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작품의 아트워크가 마침 눈에 들어왔다. 여태껏 내가 배워왔고 알아왔던 ‘‘좋은 그림’의 표본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그림이었다. 배경과 캐릭터 모두 자글자글한 손맛이 살아있는 라인으로 그려졌고, 흑백의 대비와 연필 톤으로 모든 사물이 묘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연출 방식이었다. 공간 구성과 화면의 이동, 인물들의 동선이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표현되어 있었다. 2D이기에 가능한 연출이기도 했고, 패기 넘치는 신입 감독이기에 가능한 연출이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속 분위기는 틀에 박힌 표현을 벗어나 한껏 자유로운 생동감이 넘쳐났다. 작품의 제목은 [튜브 엔젤]. 검은 쫄쫄이를 입은 채 소박한 선행을 실천하는 검은 천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으로, 나는 첫눈에 이 애니메이션에 매료되었다. 그 길로 장감독의 팀에 합류했다. 그리고 졸작실 한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겨울이 되기까지 작품에 푹 빠져 지냈다.
초중고 모두 개근상을 받았다. 성실하지만 융통성 없는 부모님 덕에 전염성 눈병으로 눈이 퉁퉁 붓더라도 어떻게든 학교만큼은 가야 했다. 덕분에 개근상을 받았지만 고리타분한 부모님 아래에서 고리타분한 사람으로 자라났다. 그런 나에게 게 휴학은 생애 최초의 일탈과 방황을 뜻했다. 내가 속한 학문이 못내 불확실하다는 이유를 휴학의 원인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실상 근원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말하기 부끄럽긴 하지만, 그림 그리는 일 자체에 대한 의심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잘 그린다 들었기에 그림이 좋았다. 편편한 바닥이 있다면 언제 어디든 그림을 그렸다. 매번 그럴싸한 그림을 척척 그려낸 건 아니지만 괜찮았다. 특별한 목표가 없으니 그마저도 즐거우면 그만이었다. 늦깎이 미대 입시생이 되었을 무렵 더 이상 그림은 단순한 즐길거리가 아니었다. 그를 통해 대학을 가야 했고 남들과 실력을 겨눠 평가받아야 했다. 미술 학원에서 내 그림을 잘 못 그린 그림 쪽에 가까웠다. 미대에서 원하는 그림은 내가 즐겨 그렸던 그림과는 하등 상관이 없어 보였다. 내 실력이 친구들에 비해 형편없다는 사실은 나를 한없이 위축시켰다. 그때 나는 내 그림이 처음으로 부끄러웠다.
좋은 그림 나쁜 그림 딱히 기준이 없다지만 입시 미술에 있어서만큼은 달랐다. 일정 기준에 ‘미달’된 그림은 나쁜 그림이었다. 정확한 인체 표현, 투시가 잘 반영된 공간 표현과, 명암이 확연히 구분되는 색과 톤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완벽한 그림’은 어렵고 힘들었다. 나에게 입시 미술이란 그림으로 쓴 실패를 맛보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입시가 끝나고 본래 원했던 대학에 떨어졌다. 대신 계원대 애니과에 붙었다. 열패감은 없었다. 지긋지긋한 입시가 끝났다는 사실만으로 후련했다. 내 생애 두 번의 입시 미술은 없다 다짐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학과 내에서 꽤나 그리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정확한 인체 표현과 생동감 넘치는 동세 표현에 시간을 할애했고 과감하고 정확한 투시가 돋보일 수 있는 구도를 골몰했다. 정석적으로 잘 그려진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 생각했다. 그리 배웠고 대부분이 정답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을 대하는 마음이 어려워져만 갔다. 눈앞에 놓인 하얀 여백이 막막했다. 무엇으로 채워도 여백은 ‘잘’ 채워지지 않았다. 결국 그림이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예전에 비해 흥미를 잃은 걸 수도, 혹은 원하는 만큼 내 실력이 뒤따르지 않아 스스로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추측을 했을 뿐이다.
졸업 작품을 도우면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것은 아주 명확하게 다가왔다. 이전까지 나에게 맞는 그림 스타일에 대해 나는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고민으로 안내받은 기억도 없다. 회사에서 그린 기계적인 선과는 정반대로, 그을 때마다 손의 잔떨림이 느껴지는 선으로 그려내는 [튜브 엔젤] 속 그림 스타일은 낯설었지만 내 손에 꼭 맞아떨어졌다. 나는 금세 애니메이션 그림에 익숙해졌다. 애니메이션 속 소재들은 마치 어느 그릇에나 담을 수 있는 ‘물’처럼, 어떻게든 그려낼 수 있었다. 캐릭터들은 마치 고무처럼 팔이 저만치 늘어나기도, 몸이 꽈배기처럼 배배 꼬이기도, 몸이 풍선처럼 불어났다가 바람이 빠지듯 날아가기도 했다. 딱딱한 자동차나 빌딩도 말랑거리는 마시멜로같이 표현되기도 했다. 감독의 디렉팅이 있었지만 배경과 캐릭터들을 어떤 감각과 촉감으로 그려낼지는 그리는 이의 몫이었다. 화면 속 그림들이 내가 의도했던 방향으로 움직이고 숨을 쉬었다. 선배들의 덕담과 칭찬 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재미있었다. [튜브 엔젤] 을 그리면서 실로 오랜만에 그림 그리는 감각이 되살아났다. "잘 그린 그림" 울타리 밖에는 언제나 내가 사랑했던 그림이 그대로 있었다. 전형적인 룰이 필요한 그림보다 자유로운 방식으로 그려낸 그림이 나에게 맞는 그림이었다. 선배들을 도우면서 ‘내가 그릴 수 있는 영역’이 한층 넓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반드시 필요했던 순간 [튜브 엔젤]을 만난 건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복학을 고려할 시기가 다가왔을 때 별 고민 없이 복학을 결정했다. 애니메이션이 나에게 맞는 분야임을 스스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처럼 고지식하면서 정직하게 노력하면 확실한 결과물이 나오는 이 일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