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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4] 셀프 코칭 53. 키로얄KirRoyal

by 벨플러 Miyoung

상처가 아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요? 예전에 친구가 한 말이 떠오릅니다.

“기억이나 추억을 잊는 데는, 경험한 그 기간의 딱 반이 걸리는 것 같아.”

친구의 말에 의하면, 6년간의 경험이라면, 3년이 지나면 기억이 희미해진다는 의미였어요. 힘든 일이나 상처가 있었다면, 그 일이 일어났던 전체 기간의 반이 지나야 상처가 아문다는 이야기죠.


저의 경우 하나의 큰 상처 덩어리가 이제 사라지고 있는 걸까요? 최근 들어, 과거의 특정 생각이 떠오르면 그저 무심하게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어요. 몇 년 전에 생겼던 몸에 난 상처도 사라지는 걸까요? 피부 조직의 성질이 변해가는 듯, 요 며칠 눈에 띄게 상처자국이 연해지고 있습니다.


20여 년의 기간 중에 생긴 상처였다면, 10년은 걸린다는 말인데요. 단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으로 봐서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합니다. 5년이 지난 지금, 옛 인연들과 이야기하며 거리낌 없이 웃게 되었으니까요.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군요. 인연이 끊어졌다 생각했으니까요.


나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 잠가 버린 기억이, 짠! 하고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동안 먹지 않던 과거의 음식이 사무치게 생각날 때가 그렇습니다. 잊고 살았던, 칵테일이 음료 메뉴에서 눈에 띌 때가 그렇습니다.


키로얄 KirRoyal은 제가 가장 좋아했던 칵테일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제 인생에서 사라져 있었죠. 아예 잊고 살았어요.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바 bar에서 생각을 정리하고자 했습니다. 하이네켄을 한 잔 하며 공항 특유의 답답한 공기도 씻어 내리고 싶었어요. 자리를 잡고 메뉴를 훑어보다 아! 라며 순간 탄성을 질렀습니다. 제일 좋아하는 칵테일 키로얄KirRoyal을 메뉴에서 본 것입니다.

“와! 아니, 5년 동안 잊고 살았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키로얄KirRoyal은 블랙 커런트 시럽(crème de cassis)과 샴페인을 섞어 만들면 되는 아주 간단한 칵테일이죠. 제가 이 칵테일을 좋아하는 이유는 맛도 있지만, 오감을 자극하는 특별함 때문이에요. 분홍빛 기포가, 마시는 내내 올라오니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스읍, 스르륵, 사사삭하며 잔잔하게 들리는 샴페인의 버블소리는 또 어떻고요. 차갑게 chill 된 잔을 들어 올리면 달콤 신선한 향이 은은하게 퍼집니다. 달달하나 드라이한 샴페인의 맛이 가미된 키로얄만의 핑크빛 로맨틱한 맛이 있거든요.


엊그제, 5년 만에 다시 만난 키로얄을 마시며 그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제 나는 많이 치유가 된 걸까?’ 트라우마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선택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사건을 받아들이는 생각이 모두 제각각이라는 것이죠. 타인이 보기에 고통스러운 일도, 당사자가 별 중요치 않게 생각하면 트라우마가 아니라는 것이죠. 글을 읽으며 ‘나는 트라우마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 하며 저의 생각을 바꾸기를 원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 생각이라는 것은, 나의 의지로 마음대로 조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감각과 감정이 의지 이전에 존재했어요. 아무리 제 생각을 바꾸고자 해도, 되지 않았죠. 경험과 성격에서 오는 무의식의 조합을 깨기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었죠. 잊으려, 생각을 바꾸려 안간힘을 쓰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질 않았죠. 오히려 저의 에너지를 고갈시켰어요. 오히려 더 감정의 덫에서 허우적대게 만들었죠. 역효과를 내고 있었어요. 생각을 바꾸려 안간힘을 썼어요. 감정을 인위적으로 바꾸려 애를 썼어요. 그랬더니,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더 처절하게 피를 짜내는 꼴이 된 것이죠. 그저 내버려 두면 덜 아플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자연스레 상처가 아물 텐데 말이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다시 만난다는 것, 다시 떠오른다는 건, 어쩌면 나의 트라우마가 이제 치유되고 있다는 뜻 같아요. 그러니 이제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기로, 굳이 무얼 하기 위해 애쓰지 않기로, 특히 치유하려 안간힘을 쓰지 않기로 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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