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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엔 Oct 28. 2020

다시 만난 세계, 전통시장

약은 약사에게서, 건어물은 <중부시장>에서

나 어릴 적 우리 엄마는 검은콩을 사러는 경동시장으로, 제철과일이나 채소를 사러는 청량리 청과물 시장으로, 1~2년에 한 번씩은 내 한복을 사러 광장시장으로, 오징어채나 멸치를 살 때는 중부시장으로, LA갈비나 수입품을 사러는 남대문 도깨비 시장으로 참 바지런히도 장을 보러 다니셨다.


덕분에 나도 시장마다의 특산품이 무엇인지는 물론이고 가장 맛있는 먹거리까지 다 꿰고 있었다. 광장시장에 가면 꼬마김밥(이것은 나중에 그 유명한 마약김밥이 되었다.)과 우뭇가사리는 꼭 먹었고, 남대문 시장에 가면 으레 생선골목에 가서 고등어나 갈치조림을, 중부시장에 갈 때는 시장 뒤쪽 길 건너 오장동에서 냉면을 먹었다. 특별한 맛집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갈 때면 당연히 가는 곳이었다.


우리 동네에 마트도 있고 재래시장도 있었는데도 특정한 음식이나 재료를 살 때 엄마는 날 한 손으로 끌고, 어쩔 때는 우리 오빠까지 양손에 애 하나씩 달고는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걸어서 시장을 다니셨다.

내가 조금 커서 더 이상 엄마를 따라다니지 않게 되었을 즈음, 엄마는 여전히 이 시장 저 시장 찾아다니셨는데 난 그게 그렇게 촌스러워 보이고 시간 낭비 같아 보였다. 마트나 백화점 식료품 코너가 얼마나 잘 되어 있고 물건도 좋은데 굳이 시장만 찾아다니는 엄마를 난 구식이라 생각했고, 시장을 무시했었다.


얼마 전 우리 집 잔멸치가 똑 떨어졌다. 시어머니께서 소래포구에서 사다 주신 것이었는데 냉동실 깊숙한 곳에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않을 것 같던 멸치 한 봉다리. 볶아서 밑반찬으로, 아이들 주먹밥 재료로 특별한 반찬이 없을 때 한 줌씩 꺼내 썼더니 어느새 바닥난 것이다. 언제 다 먹나 애물단지 같았는데 아쉽기까지 했다.

냉동실 안주인 잔멸치



장 보러 동네 마트에 간 김에 잔멸치도 좀 사볼까 하고 봤다. 내가 그리 하찮게 여기던 멸치의 가격이 하찮지 않음에 놀라며 마트의 멸치를 샅샅이 훑어봤다. 한 상자 단위로 파는 것은 양이 너무 많고, 소포장으로 파는 것은 누르스름한 게 때깔이 맘에 들지 않았다. 자고로 멸치는 지리든 국물용이든 하얄 정도의 은빛이 돌아야 하고 방금 감고 말린 머리카락처럼 아주 약간의 수분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프로 시장러의 딸로서 이미 알고 있는 기본 중에 기본이니까.

마트에서 직접 본 것도 맘에 들지 않는데 인터넷으로는 더더욱 사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 건어물은 중부시장이지. 가자.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선캡을 눌러썼다. 돌아올 때 짐이 많아질 수도 있으니 일부러 배낭까지 골라 메는 순간 깊은 깨달음이 밀려왔다. 아주머니들이, 할머니들이 패션을 몰라 썬캡에 배낭을 지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중부시장에 도착해 이 놀라운 실용 패션 선두주자들 사이에서 나는 재빠르게 멸치들을 스캔했다. 대충만 봐도 동네와는 비교도 안되게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어느 가게에서 사더라도 잘못 샀다고 후회할 일은 없어 보였다. 여러 가게 흥정할 것도 없이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서 계시는 가게에서 지리 멸치 한 봉다리를 샀다. 그리곤 중부시장 뒤편 오장동 회냉면 집에서 냉면 한 그릇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중부 시장



그 날 바로 저녁 밥상에 멸치볶음을 해서 올렸다. 여섯 살 둘째가 말도 없이 멸치 하고만 해서 밥 한 그릇을 뚝딱해치우는 걸 보는 걸 보고 난 생각 했다.

'멸치 사러는 중부시장에 가야 하는구나!'


엄마 손에 끌려 다니던 내가 그 시절 우리 엄마의 나이가 되어 그 시장을 내 발로 찾아가게 된 것이 좀 웃겨서 엄마께 여쭤보았다.

"엄마, 건어물이든 검은콩이든 아무데서나 사지 뭐하러 이 시장 저 시장 찾아다녔어?"

"그럼 이 뽑으러 치과 가지, 안과 가리?"

아...! 엄마는 내가 좀 걸어 다닐 수 있었던 대여섯 살부터 데리고 다니며 몸소 가르쳐 주셨는데 난 마흔이 넘은 이제서야 그걸 알았다.


70대 중반이 된 우리 엄마는 이제 많이 걷기가 힘드셔서 시장 대신 주로 홈쇼핑으로 음식이나 식재료를 주문하신다. 이제는 이 시장 저 시장 지칠 때까지 다니실 의욕은 없어 보이 신다. 내가 조금 더 일찍 엄마의 촌스런 시장 투어에 눈떴다면 몇 번은 더 같이 멸치를 사고 회냉면을 먹었을 텐데...

엄마와 시장에 가고 싶다. 일곱 살의 나와 서른여덟 살 그때의 엄마가 버스 타고 종로 4가에서 내려, 퇴계로 쪽으로 횡단보도를 몇 번이나 건너 걸어가던 그 중부시장을.. 등받이 없는 좁고 기다란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차가운 우뭇가사리를 나누어 먹던 그 광장시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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