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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엔 Nov 06. 2020

남산타워에는 전 남친이 산다

어려서부터 늘 남산타워를 동경해왔다. 에펠탑도 아니고 자유의 여신상도 아닌, 언젠간 꼭 가보고 싶은 곳은 다름 아닌 남산타워였다. 심지어 내 방 창문으로 남산타워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도,

"남산타워는 서울에 처음 오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야. 서울 사람들은 안 가."

라는 아빠의 말씀에 정말로 그런 줄로만 알고 자랐다. 서울 사람이 남산타워에 가면 촌스런 사람이 되는 줄 알았다. 그래도 가보고 싶었다. 남산타워 꼭대기에 회전하는 식당이 있다는데 진짜인지 나중에 꼭 가보자 생각했다.


부모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다니기 시작한 스무살 즈음, 처음으로 남산에 올랐다. 그러다가 남자를 사귀는 동안에는 남산에 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연애하느라 남산 갈 시간은 내지 않았었나보다. 그러다가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면 공허해진 시간을 채우러, 무기력해진 마음을 잠시 잊어보려 남산에 올랐다. 그렇게 남산과 남산타워는 나에게 이별의 상징이 되어버린 동시에 전 남친들을 묻어버린 마음의 무덤이 되었다.

남친A와 헤어져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참담한 심정으로, 남친B를 찬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남친C가 몰래 딴 여자를 만난 걸 알고 상처 받은 영혼으로..늘 그런 상태로 올랐던 남산 오르기가 즐거웠을 리가 없다. 도 닦는 마음으로 다녔던 것 같다. 누구와 함께 올랐던 적도 없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며 벚꽃이 흩날리던 남산의 봄은 왜그리 추웠는지, 봄은 절대 따뜻한 계절이 아니라는 걸 그 때 알았다. 연애의 끝에 만난 봄은 그렇게 매서운 바람으로 꽃잎을 떨어뜨렸다.

초여름, 남산이 머금고 있던 그 싱그러운 습기는 금새 내 얼굴을 축축하게 적셨는데.. 그건 내 안구에서 흐른 습기였는지도..

단풍이라도 보면 괜찮을까 하고 가면 단풍이 아직이고, 며칠 있다가 가보자 하고 가면 이미 단풍은 다 떨어지고 휑한 남산을 오르는 이는 나 뿐이더라.

어떻게 외롭지 않게 남산을 오를 수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는채 연애로 안달복달하던 20대가 그렇게 지나갔다.



이제는 남산에 쉽게 갈 수 없는 곳에 살고 있다. 가끔 차타고 가며 멀리서나마 잠깐 볼 수 있을 뿐..

미세먼지 수치가 좋지 않은 날, 올림픽대로를 달릴 때 보이는 뿌연 남산타워는 착하긴 했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남자친구 같다. 멀리 떠나온 게 미안해서 마음이 좀 저릿하다. 

늦은밤, 성수대교를 건널 때, 도시의 불빛들과 어우러져 멋진 야경의 주인공인 남산타워는 잘 나갔던 그 남자.. 내가 훨씬 더 많이 좋아했던 그 남자 같아 그 또한 마음이 저릿하다.

지나간 남친들을 못 잊은 것은 절대로 아니다. 진짜다.(남편이 내 구독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고.) 그 남자들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인데, 남산타워에 묻어둔 그 때의 감정은 여전히 나에게 저장이 되어있나보다.



어릴 때는 남산타워를 동경했고, 한창 젊을 때는 사랑했으며, 이제는 아주 조금 시큰한 과거다. 오랫동안 가슴 시리게 짝사랑하다가 꿈만 같이 그와 사귀게 되었지만 결국 헤어져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하는 기분. 

남산타워 꼭대기에 있다는 회전 식당은 결국 가보지 못했다. 이뤄지지 못한 사랑의 끝은 알 수 없는 것처럼.


'남산타워'라는 이름은 언젠가 'N서울타워'로 바뀌었다. 남산타워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글로벌하게 들린다. 하지만 '초등학교'보다 '국민학교'라고 말이 먼저 나오는 이 올드한 아줌마 입에서 'N서울타워'라는 말을 꺼내기가 왠지 쑥쓰럽고 간지럽다.

남산타워는 멋진 이름으로 바뀌었고 옛 남친들은 현재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 그들은 여전히 (구)남산타워에 살고 있다. 20년된 구닥다리 연애의 말로가 거기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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