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엔 까미노 민정 07

까미노 나를 부르다

by 강민정

열 이튿날.

Navarette - Azofra 22km. 아소프라 Azofra

오전 6시 기상.

7시에 동이 튼 것 같다. 역시 아침이 좋다. 푸른 하늘, 따스한 기온, 그리고 더운 한 낮.

산책로에 부부들이 많이 보였다. 부모님 생각이 났다. 뭐 그리도 힘드신 건지. 반평생 함께 살아왔는데 아직도 서로에게 원하시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들 때문에 마음 졸이시며 사시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이제는 나 때문에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 때문에라도.

그저 그리운 사람들 생각에 하늘만 보고 걷다가 그 예쁘고 멋진 나헤라를 그냥 지나쳐서는 아소프라까지 단숨에 와 버렸다. 아나와 존이 여기 알베르게가 좋을 것이라고 했었는데, 오면서 보니 들길 어딘가에 대문짝만 하게 누군가 독일어로 아소프라 알베르게 홍보를 해 놓았었다. 그래서 그냥 여기로 왔다. 진짜 훌륭했다. 2인 1실. 새로 지었는지 깔끔하다. 숙소에 들기에 너무 이르다 싶은 시간이었지만 멈췄다.

너무 더운 날씨에 지치고 힘들어서 나헤라를 지나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정말 예쁜 동네였는데. 날씨도 아주 좋았고. 사람들이 해가 내리쬐는 노천카페에서 한낮의 오후를 즐기고 있었을 그때, 나는 그 날씨가 아까워서 빨래를 했다. 내게 소중한 햇볕. 마당 한가운데 풀(pool)이 있었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니 뼛속까지 시원함이 느껴졌다.

오늘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게 평소보다 배가 더 고프고 또 마음도 허한 것 같았다. 마음이 자꾸만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향했다. 독일로 온 지 두 달 동안 이런 날이 없었다. 존이 다가와서는 왜 그러냐고 물어볼 정도로, 아주 조용히 앉아서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냥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을 하긴 했는데 짙푸른 하늘을 쳐다보자니 나도 모르게 굵은 눈물 한 줄이 뚝 떨어졌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참고 또 참고 괜찮다고 하면서 저녁 식사를 한 후 방으로 들어갔다.

베트남 출신 뉴요커 자신타가 방에 있었다. 지금은 웹디자이너 일을 멈추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여행 중이라고 했다. 참 온화했다.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오자 시끌벅적한 일행이 들어왔다.

아구스틴과 또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가 오늘은 어디에서 묵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아구스틴-” 하고 큰소리로 인사를 건네었다. 얼굴이 벌건 아구스틴도 반가워했다. 유쾌하고 또 재미있어 보이는 산티아고와 아센 부부, 마리안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열셋째 날.

Azofra - Grañon 22km. 그라뇬 Grañon

오전 6시 기상. 오전 7시 30분 출발 푸른 하늘.

언제나처럼 출발은 첫 번째였다.

많이 더워서 천천히 쉬엄쉬엄 걸었다. 그러다 쉬기에 딱 좋은 장소를 만났다. 가방을 풀고 언덕 밑을 내려다보며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저만치 언덕 아래에 아구스틴 일행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의사소통도 어렵고, 쑥스럽기도 해서 일어설까 말까 마음이 분주했다. 그러나 한 편 반갑기도 하고 어제 인사도 하고 했으니 피하지 않기로 했다. 흥에 겨운 얼굴로 걸어오는 산티아고를 향해 크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다.

아구스틴이 어느 알베르게로 갈 것인지 물었다. 그래서 산토 도밍고를 말했더니 그라뇬 알베르게를 소개받았다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곳은 마루로 되어 있고, 함께 음식도 만들어 먹는 곳이고 분위기도 아주 좋다면서 괜찮다면 함께 거기로 가자고 묻는 것이었다. 산티아고와 아센 부부가 지난여름에 산토 도밍고와 그라뇬에서 각자 자원봉사를 했는데 그곳 알베르게가 아주 좋다고 소개했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볼펜을 꺼내 든 아구스틴은 자신의 주소와 이메일과 전화번호를 적어서 건네주었다. 그리고 내게도 적어달라고 했다. 기분이 묘했다. 이렇게 친구가 생기게 되는가 보다. 들뜨고 기쁜 마음을 숨기고 로이틀링엔 기숙사 주소와 전화번호, 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러는 중에도 산티아고는 계속 말을 시키고, 아센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마리안은 간식거리를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정신을 쏙 빼놓는 사람들이었다. 산티아고는 동양 친구가 신기하셨는지, 내가 좀 친근해 보였는지 말을 많이 걸어주셨고, 아구스틴이 통역을 해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부터 같이 가자고 내게 제안을 한 것도 아니었고, 같이 가도 되겠느냐 묻지도 못하겠고, 차라리 자리를 먼저 뜨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걸음이 느려서 지금 출발해도 당신들보다도 늦을 것이니 먼저 좀 출발하겠다.” 이게 전부였다. 인사를 하고 겨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 모두 내 앞으로 보내야 했지만.

산토 도밍고 동네에 거의 다 왔을 즈음에 순례자 안내소가 보였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스탬프를 받고 있었다. 산티아고는 천천히 마을을 향해 걷고 있었다. 산티아고 옆을 지나쳐서 걷는데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나는 다가가서 조용히 “화장실~~”이라고 했다. 알베르게에 가면 되니까 함께 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를 따라갔다.

산토도밍고 알베르게는 정말 예쁜 곳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산티아고에게 “화장실” 하고 조그맣게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유창한 스페인말로 알베르게 위쪽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너무 급해서 그의 손가락만 보고 올라간 터라 이층에서 화장실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 정신이 혼미했던 나는 한 숨 돌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아래로 내려왔다.

내려와 보니 아구스틴과 마리안, 아센도 도착해 있었다. 마을에 있는 대성당을 관람할 것이라며 동행하겠냐고 물었다. 가방을 알베르게에 맡기고 따라나섰다. 알베르게안에서는 이탈리아 청년이 T자형 나무 십자가 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다. 산티아고 부부와는 잘 아는 사이어서 저녁나절에 그라뇬 알베르게에 올 것이라고 했다.

일행은 성당으로 가기 전에 바(Bar)에 들러서 커피와 빵을 먹었다. 그때까지 나는 걷는 동안에 어딘가를 들어가서 오랫동안 앉아 편히 쉬어 본 일이 많지 않아서 낯설었다. 아구스틴이 빵에 모르시야라는 것을 얹어서 건넸다. 무슨 동물의 피를 가지고 만들었다는데 쌀알이 들어있는 소시지 형태였다. 순대 같았다. 까만 것이 순대랑 너무 닮았는데 맛이 꽤 훌륭했다. 음식 값을 내려고 하자 괜찮다고 하면서 아구스틴이 오히려 내 몫까지 내주었다. 다음엔 내가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성당으로 향했다.

큰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제대로 관람하는 것도 사실 처음이었다. 마을에 도착해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둘러보는 것도 그리 충실하지 않았다. 내겐 길과 길 위의 사람과 그 안에 계신 그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당이나, 천주교의 흔적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었다. 그런데 아구스틴도 그렇다고 했다. 통했다. 그저 아름다울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뜬금없이 자신은 농사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성당에 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고 나니, 더 이상 그 안에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그 사이 마리안도 이미 밖으로 나와 있었다. 마리안은 아센을 기다렸고, 아구스틴과 나는 함께 동네를 돌아다녔다.

출발하려고 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무실 안에 있는 가방을 챙기려는데 마리안이 이미 내 것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 따스한 그녀의 마음이 내 가슴으로 훅 들어왔다. 각자 비옷을 입고 가방을 챙기는 동안 서로를 도와주었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만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함께 걷는 동행자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저만치 앞서 가고 있던 마리안과 아구스틴이 느린 걸음의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며 걸었다. 누군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이, 묘한 기분을 들게 했고 든든하기까지 했다.

그랴뇬에 거의 다다랐을 때, 날은 이미 많이 어두웠고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어둑한 데다 안개가 자욱해서 앞서 걷는 사람이 보이지도 않았으나 목소리가 들렸다. “민정-.” 아구스틴의 목소리였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안도 함께 있었다. 마음에 안심이 된 나는, 속도를 내서 걸었다. “여기 있어.” 내가 보이면 다시 걷기 시작하던 그는 노래를 부르며 마치 뮤지컬을 하듯 춤사위를 보이면서 걸었다. 즐거워 보였다. 마리안과 나도 덩달아 즐겁게 걸었다.


알베르게에 들어서 보니, 아늑하고 포근한 것이 오두막 같았다. 아기자기하고 산장 같은 분위기가 평안했다. 한쪽엔 오래되어 보이는 피아노가 있었고, 벽난로가 따스한 온기를 뿜고 있었다.

순례자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오스피탈레라로부터 주의 사항을 듣고는 가방을 풀고 산티아고 부부와 마리안을 따라 동네로 나섰다. 지난여름 자원봉사를 했던 곳이라 동네 가게의 주인들을 알고 있는 산티아고와 아센은 그네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덕분에 심심하지 않게 동네 구경을 했다. 바(Bar)에 들어가서 호젓하게 커피도 마시며 피곤을 풀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날은 추웠지만 마음은 더없이 따스하고 행복했다. 산티아고는 자신의 우산 속에 나를 초대하여 한쪽 팔을 기꺼이 내어 주셨다. 꼭 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뭔지 모르게 편안했다.

돌아와서 주방 일을 도우려 하자, 아센이 마늘과 양파를 만져야 하는데 냄새난다고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식탁 차리는 것만 겨우 도왔다. 그리고 모두가 바쁜 틈에 쉬고 있던 알베르게 식구들의 어깨를 차례대로 마사지해드렸다. 순례자 모두, 무거운 배낭 때문에 어깨가 가장 많이 아프다. 처음엔 미리 약속했던 마리안, 아센, 그리고 산티아고를 해드렸다. 그랬더니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두 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쁘게 마사지를 해드렸다. 내 어깨도 펴고 허리도 펴면서 운동이 되어 좋았다. 나 또한 마사지받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를 시원하게 해주는 것도 좋아해서 기꺼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그랬더니 마이클이 내게 마사지를 해주겠다고 나섰다. 아주 시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낮에 만났던 이탈리아 청년이 방문을 했는데, 이번에는 그가 내 어깨를 한 번 만져주었다. 와우. 그도 마사지를 배운 적이 있다고 했다. 나는 복이 많다.


식사를 시작하자마자 산티아고와 아구스틴의 극진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산티아고는 혹여 내가 잘 먹지 못 할까 걱정스러웠는지 계속해서 맛있냐고 물어보셨다. 아구스틴은 옆에 앉아서 샐러드랑 수프가 떨어지기 무섭게 계속 내 접시를 채워 주었다. 수프가 너무 맛있었다. 마늘, 양파, 돼지고기, 바게트 빵, 올리브유, 토마토를 넣어 만든 붉은빛의 수프는 육개장을 떠오르게 했다. 환상적이었다. 비 오는 날의 뜨거운 국물.

풍성하고 맛있는 식사 후, 아구스틴과 또 다른 남자분들이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단지 서성거리면서 쓰레기만 치웠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마무리하고 씻고 자려고 할 때쯤, 아구스틴이 어딘가 가려하길래 물었더니 “세리머니를 하러 가는데 같이 갈래? 같이 가자!” 하면서 팔을 잡아끌었다. 그래서 자세히 알지 못한 채 따라나섰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무도회장에라도 가는 듯 즐거이 오스피탈레로를 따라 이동했다. 인도된 곳은 마을 입구에 있던 건물이었다. 기도처였다.

큰 십자가가 기도처 중앙에 세워져 지붕까지 닿아 있었다. 둥글게 서서 오스피탈레로가 인도하는 데로 따라 했다. 순서지처럼 보이는 종이에 각 나라말이 쓰여진 것으로 진행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과 이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모두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모국어로 하기도 했고, 또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순례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기도 했다. 따스했다. 매일 밤 이렇게 걷는 이들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감사했다.

돌아오려고 할 때,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는데 오스피탈레로와 오스피탈레라가 문이 닫히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었다. 열쇠가 말을 듣지 않아서 약 십분 정도 소요되는 동안 모두가 알베르게로 돌아갔는데, 나는 그곳에 서서 그들에게 우산을 받쳐 주었다. 아구스틴도 갔으려니 했는데 저만치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스피탈레로가 미안한 듯이 고맙다면서 먼저 가라고 했다. 그러마 하고는 기다려준 아구스틴에게 미안해서 뛰어갔다. 오늘 여러 번 기다려준 아구스틴에 대한 작은 답례였다.

잠자리로 돌아왔을 때 한 번 더 아구스틴에게 고마웠다. 아까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방의 가장자리 벽 쪽에 내 배낭을 놓았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 자리에는 아구스틴의 가방과 매트리스가 있는 것이었다. 내 것은 그의 옆 자리, 그러니까 안쪽으로 옮겨 있었다. 물어볼 시간을 놓쳐서 이 후로도 묻지 못했는데 아마도 끝 쪽이 추울까 봐 그가 자리를 바꾸어놓지 않았나 싶다. 그가 춥다면서, 내 자리에 매트리스도 하나 더 깔아 주었다. 어이구 친절하기도 하셔라.

“나는 산티, 너는 민정!”(yo Santi, tu Minjung) 낮에 만난 이후로 계속 아이처럼 좋아하며 산티아고와 장난을 쳤다. 잘 때까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까워지고 장난도 자연스럽다. 혼자였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 그리고 따스함.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기뻤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구스틴이 물었다.

“언제 그라뇬에서 묵기로 생각을 바꾼 거야” 하고. 그러고 보니, 나는 같이 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주 자연스럽게 산토도밍고에서 그네들과 일행처럼 동네 구경을 하고, 내 가방을 들어준 마리안을 따라온 것 같다. 네가 말해서 바꿨지 라고 했더니 재미있다며 웃었다. 그래 재미있는 일이다. 사람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혼자여서 더 호젓하고, 생각도 많이 할 수 있었고, 그래서 편안했고, 신경 쓸 일이 없어서 좋았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곳으로 가서 조용히 시작하고 싶어서 아라곤을 선택했던 것처럼 이번엔 친구들과 함께 걷는 것을 선택했다. 친구가 생기는 것, 이제 이 또한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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