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엔 까미노 민정 06

까미노 나를 부르다

by 강민정

아홉째 날.

Estella - Los Arcos 21km. 로스 아르코스 Los Arcos.

지난밤 묵었던 에스테야의 알베르게는 아침이 되자 음악도 들려주고, 식사도 제공해주며 순례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친근한 숙소였다.

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루였다. 쉼 없이 걸으며 푸른 하늘을 맘껏 누렸다. 며칠 전 생리를 시작했을 때, 문득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떠올렸었다. 내 몸을 사랑할 줄은 아는가라고 자신에게 반문하며 설교한 적이 있었다.

몸 구석구석 모든 기관들이 서로 사랑하고 머리와 마음이 꿈을 함께 이루기 위해 서로 품어주는 것을 느끼고 있다. 왜 그렇게 작고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생각했었을까. ’ 조금만 참아, 힘들면 쉬자’ 하면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기쁨을 이제야 조금씩 맛보는 것 같다.


알베르게에서 아침 식사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예비로 사두었던 빵이 고스란히 배낭에 남은 상태였다. 사실 가벼운 것이었지만, 일용할 양식만을 챙겨야 했는데 점심 빵 이외의 것까지 챙긴 것이 괜스레 부담이 되었다.

멀리서 걸어오고 있어 얼핏 보이는데도, 걸인이라 추측이 되는 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오하이오 고자이마스’라고 크게 일본어로 인사를 해왔다. 한국인이라고 말했더니 이번에는 ‘사요나라’ 하는 것이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그에게 대뜸 ‘안. 녕. 하. 세. 요’ 라 하는 거야 라는 식으로 말했더니, 돌아오는 말은 ‘플리즈 레이디’ 이 한마디였다. 궁색해 보이는 그에게, 그 사람만큼이나 가진 게 없던 나는 빵 한 덩어리를 주기로 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천사였구나. 가방이 가벼워지도록, 아니 마음이 가벼워지도록 나타난 천사.


‘길’ 이 감사한 하루였다. 가을걷이가 끝난 예쁜 들판이 너울거리는 산등성이를 돌고 돌았지만, 그리 높지도 그리 낮지도 않아서 내리막길인 것처럼 쉽게 걸었다. 늘 그렇듯이 뒤에 따라오다가도 앞서가는 이들이 있었지만 난 순례자들과 스치며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참 기분 좋았다. 혼자 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을 걷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그동안은 자연이 그리고 지금은 사람들이 내 마음을 달래주고 있다.


푸른 하늘을 보며 걸으니 그 하늘에 푹 빠져서 피곤한지 몰랐다. 그러다 문득, 길을 잃었던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났다. 계속 노란 화살표를 놓치곤 하면서 아라곤을 마쳤던 그 길. 때론 화살표를 버리기도 했었다. 길을 잃었지만 사실, 길은 또 있었다. ‘남이 잘 가지 않는 길’에서 오히려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청소녀 쉼터 아이들 생각이 났다. 그 아이들의 방황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다만 어떤 선택을 하는 순간에 판단하기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지금의 내 관점에서 볼 때는 그들이 괜찮지 않은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아니 실상 덜 괜찮다고 평가하는 것조차도 어쩌면 나의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관점엔 불편한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그것은 그들의 최선의 선택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경솔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누구의 것이 아닌 바로 그 아이의 경험에서 얻은 배움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가 열어갈 새 인생길에서 귀하게 작용할 것임을 이제는 조금 알겠다. 남들과 다른 길에서 조금은 인생이 목적하는 곳에 늦게 도착할 수도 있고, 때론 길을 잃을 때도 있을 테지만, 내가 ‘길’에서 맛 보아 알게 되었 듯 우리가 선택한 길은 잘못된 길이 아니라 남들과 조금 다른 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 다. 그러니 잃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걸을 뿐인 것이다. 그렇게 믿게 되었다.

이제 돌아가서 아이들과 또 만나게 된다면, 그저 그네들의 길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살아내면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들의 걸음을 곁에서 바라보고 싶다. 그 친구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



열 번째 날.

Los Arcos - Logroño 28km. 로그로뇨 Logroño

아침에 아나와 존과 인사를 나누었다. 여느 때처럼 변함없이, 새벽같이 일어나서 함께 출발했다. 다른 순례자들은 일행들과 준비하느라 대부분 천천히 출발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늘 나와 비슷한 시간에 출발한다. 이들은 길에서 자신들의 시간을 여유롭게 즐길 줄 아는 친구들이다. 좋은 장소를 만나면, 둘이 앉아서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 나누기도 하고, 잠시 편히 누워 쉬어가기도 한다. 그 자체로 평화로워 보였다.


엊그제 만났던 그 스페인 청년과 통성명을 했다. 아구스틴. 그가 다가왔다. “부엔 까미노” 이것저것 물으면서 대화를 건네 왔다. 나이, 독일에서 무엇을 하는지, 몸은 괜찮은지 계속 질문을 했다. 그동안 그와 함께 걸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내일 각자 집으로 돌아갈 예정인데, 그는 좀 더 걸을 것이라고 했다. 오늘은 비아나까지만 갈 예정이라고 했다. 큰 도시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고 한 것도 같다. 비아나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동네처럼 예쁜 곳이었다.

아구스틴은 일행인 여인과 동네 친구 도밍고와 오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내일 로그로뇨에서 헤어진다고 했다. 이후로는 나바레테에 머물 것이라고 했다. 나도 아마 그럴 거 같다고 말하고 헤어졌다. 오늘은 좀 무리가 되더라도 로그로뇨까지 걸을 예정 었다. 며칠 만에 이야기를 하게 된 친구였는데, 또다시 헤어져서 다른 곳에 머문다고 생각하니 인연이 아닌가 싶어 괜히 아쉬웠다.

로그로뇨까지 걷는 길이 이상하게 지루하고 지루했다. 동네가 뻔히 보이는데도 좀처럼 알베르게를 쉽게 만날 수 없는 큰 도시였다. 나무 한 그루 없이 그저 길만 있는 것도 힘들었지만, 계속 걸어도 목적지가 가까워지지 않고 멀리 보이는 것도 그것대로 고문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큰 슈퍼마켓에서 과일도 사고, 밥도 사서 요리해 먹었다. 무엇보다도 부엌이 커서 아주 좋았다.



열 하루 날.

Logroño - Navarette 12km. 나 바레 떼 Navarette

아침 6시 기상. 몸이 근질거려서 더 이상 침대에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나바레떼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북적대는 알베르게에 있고 싶지 않았다. 부지런히 까미노로 진입했다. 아주 편안한 산책로가 이어져서 기분이 상쾌하고 좋았다. 다만, 어제부터 어깨와 등이 아팠기 때문에 어디라도 가서 마사지를 받고 싶을 만큼 피곤했다. 알베르게에 얼른 가서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일찍 알베르게에 도착하게 되어서, 근처에 있는 바(Bar)에서 차를 마시며 오스피탈 레라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생각보다 일찍 출근해준 오스피탈 레라에게 가방을 맡기고 씻을 수도 있었다. 빨래도 하고, 천천히 동네 구경을 했다. 마을 안에 위치한 소박한 성당 안에도 들어가 보았다. 아늑했다. 시골 교회 같은 느낌이 정겹고 좋았다. 정말 작은, 동네 구멍가게에서 식사 재료도 준비할 수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아나와 존과 부엌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존은 아일랜드 출신이었고 아나는 폴란드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직장을 그만두고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지려고 이 긴 여행을 선택했다고 했다. 그마저도 멋지게 들려왔다.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긴 여행을 함께 하는 선택을 하다니 말이다. 낯선 사람들의 연애사마저 절로 응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아구스틴이 들어왔다. 많이 지쳐 보였다. 아구스틴과 한동안 대화를 나누다 잠자리에 들었다. 이제 같은 알베르게에 묵고 있는 사람들이 또 내가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

이전 14화부엔 까미노 민정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