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나를 부르다
열넷째 날.
Grañon - Belorado 18km. 벨로라도 Belorado
오전 6시 기상.
비가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오늘 여행을 마치는 한 분이 판초를 팔고 싶다고 해서 주저 없이 구입했다. 불에 그을려 녹은 부분을 제외하고는 재질 자체가 고급이라 좋아 보였다. 좀 비싸기는 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샀다.
판초를 입고 출발하게 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웠다. 알베르게에서 안내자들과 헤어지면서, 아쉬운 마음에 그들에게 세계 지도를 선물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출발할 때부터 산티가 판초 입는 것을 도와주셨다. 머리부터 뒤집어쓰는 것이어서 배낭 위로 덮인 뒷 매무새를 챙겨주셨다. 비가 얼굴로 내리쳐 들어와서 옷이 젖기라도 할까 모자도 꼭꼭 눌러 씌워 주셨다.
출발해서 쉬는 시간에 바(Bar)에 들어갈 때까지 비가 정말 많이 왔다. 판초를 벗을 때도 산티가 도와주셨고 옆에 기다리고 서 있던 아구스틴이 받아서 입구 한 편에 널어 주었다. 두 사람은 마치 나를 위해 시중을 들어주려고 준비된 사람들 같았다. 싫지 않았다. 보살핌을 받는 느낌.
커피도 마시고 빵도 먹으며 잠시 비를 피했다. 오늘은 꼭 내 음식 값을 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데 또 산티는, 내 음식 값을 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아구스틴에게 물었더니 그네들은 아침에 하루 여정을 시작하면서 5유로 정도씩을 모아 하루 종일 지내다가, 모자라면 다시 5유로씩을 더 내서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 자리에서 5유로를 냈다. 여기까지 통역하는데 오래 걸렸다. 다들 말이 잘 안 통해서 그랬는지, 워낙 친절한 분들이셔서 그랬는지(물론 후자라고 생각하지만) 많이 배려해주셨다. 당연히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인데도, 산티는 오히려 고맙다고 하셨다.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외국인에게 이렇게까지 친절한 일인가 말이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그런 건지 너무 감사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참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다. 내가 복이 많다.
벨로라도에 이를 때까지 여전히 느린 걸음이어서 마리안조차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간간히 돌아보는 아구스틴과 마리안을 보면서 괜찮다고 손을 들어서 표시해주고는 부지런히 따라갔다. 더 못 따라가겠다고 생각이 들 때부터는 아예 마음을 편히 먹고 노래를 부르면서 걸었다. 그랬더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앞에서 아예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민정, 민정!!!” “그래, 나, 여기 있어. 가고 있어” 그리고는 기다려주는 이들에게 고마워서 뛰어가곤 했다. 동네에 다다랐을 때 새로 지은 알베르게가 보였다.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 가려 계획한 친구들은, 그들이 먼저 가 버리면 내가 길을 잃을까 봐 모두가 한 자리에 서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은 곧 작고 아담한 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갔다.
마늘을 엮어서 천정에 걸어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 와 있는 줄 알았다. 낮에도 한 가정집을 지나칠 때 보았는데 여기에도 있었다. 아센이 알베르게가 맘에 드냐고 물었다. 엄청 좋다고 했다. 알베르게가 따뜻하고 공간이 아늑해서 좋았다. 허기를 달래고 빨래도 하고 샤워도 했다. 이곳 샤워실은 남녀 공용이었다. 샤워실 바로 앞에서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고, 사람들이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을 닫아도 천장이 뚫려 있어서 같이 수다를 떨면서 샤워를 하는 구조이다. 조심스럽지만 웃음이 나기도 했다.
잠시 누웠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 보니 아구스틴이 내 침대로 와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슈퍼에 먹을 것 사러 갈 거야. 넌 여기서 쉬어도 돼.” “나도 갈래”. 내일이 아구스틴과 산티 내외가 집으로 귀가하는 날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스파게티는 아구스틴이 만들 것이라고 했다. 그의 요리가 궁금했다.
산티는 낮부터 종일 내일이면 헤어질 거라며 우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인지 내일이 벌써 코앞인 것 마냥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구스틴의 첫 일행이 끝까지 함께 걷는 동행자들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이방인인 내게 더 이상 다가오지 않나 보다 생각해서 말도 제대로 붙이지도 못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겨우, 이틀 동행했는데, 내일 집으로 돌아간다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더 같이 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 이상하리만큼 슬퍼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슈퍼에 가는 잠깐의 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동하는 동안 말했다. “나... 큰 문제가 생겼어. 오늘 낮부터 벌써 너와 저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어.” 그러자 그가 “걱정하지 마. 스페인 사람들은 모두 친절해. 네가 마음을 열면 금방 친해질 수 있어. 그러니까 염려하지 마.”라고 위로했다. “알아. 나도 알아. 그런데 벌써 그리워.”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그가 이것저것 음식을 고르면서 고기 좋아하냐며 고기로 스파게티를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몸에 좋은 것이라며 샐러드 재료로 선택해서 가져온 것은 숙주였다. ‘잘 알지?’ 하며 물었다! 하하하. 내 서양 친구가 익숙한 듯 숙주를 먹겠다고 가져오는데 오랜 친구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좋았다. 그는 더 이상 내게 낯선 이방인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에 바(Bar)에 들렀을 때, 아구스틴이 자신은 아시아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과 일본, 중국 여행을 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내년에 내가 한국에 돌어가게 될 때 혹시 여행을 하고 싶다면 함께 해도 좋겠다고 했더니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되 물었다.
그러더니 그가 자신의 집에 크리스마스 때 와도 좋다며 초대를 했다. 그때까지 나는 유럽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때 지인들을 초대해서 함께 지내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기 때문에 다시 물었다.
“가족하고 애인하고 친구들하고 지낼 시간에 내가 가도 괜찮아?”
“그럼, 상관없어. 우리 집은 항상 사람들이 많아. 집은 친구들을 위해서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우리 집, 내 가족과 나의 생각이야.”
와우. 훌륭하다, 성탄절에 꼭 가서 보고 싶다. 그의 마을과 그의 가족을 보며 그의 꿈을 들어보고 싶다.
알베르게에 돌아와서 아구스틴은 스파게티를 만들기 시작했다. 요리를 하는 동안에도 그는 가족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연년생 여동생을 사랑한다는 얘기,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가 그랴뇬처럼 작고 예쁘다는 얘기, 일터는 차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다는 것, 음식에 관심이 많다는 것, 한국과 일본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얘기해주었다.
그는 올리브유를 ‘골든 리퀴드’ 라 부르면서 스파게티 면에 골고루 듬뿍 뿌렸다. 몸에 좋은 음식에 관한 관심이 커 보였다. 직업을 바꾸고 싶다는 이야기도 잠깐 했었다. 나는 시골생활을 꿈꾸고 있어서 그런지 그랴뇬이 너무 예뻐 보인다고 했다. 그가 그런 마을에서 직접 집을 고쳐가며 살고 있다고 하니 더욱 관심이 생겼다.
어느 때 보다도 많은 비가 내린 날이었다. 혼자 걸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동행자가 있어서 힘이 생기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쉬운 밤을 보내는 기분이, 무언가 가슴에서 한 움큼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이 허하기까지 했다. 묵직하니 답답하기도 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쉬워 서운한 것 같다. 생전 처음 만나서 단지 며칠 동안 함께 지냈을 뿐인데 이렇게 가까워질 수가 있는 건지. 혼자일 때도 충분히 기쁘게 걸을 수 있었던 처음 시간을 되찾고 싶다. 그런데 이미, 친구들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으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낮엔 마리안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빌바오라는 곳에서 소아과 병동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스포츠를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걷게 되었다고 했다. 건강해 보이는 멋진 여인이다.
그냥 잠시 스칠 수도, 걷다가 ‘올라’ 인사 한 마디만 하고 지나칠 수도, 하루를 같이 보낼 수도, 며칠을 함께 보낼 수도 있는 것이 신기하다. 어떤 인연이 있어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