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나를 부르다
열일곱째 날.
Burgos - Hornillos del camino 20km. 오르니요스 Hornillos
오전 6시 기상. 오전 8시 30분 출발.
처음 만난 한국인 청년이 얼마나 반갑고 기뻤는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런 우리를 보고 마이클이 내 목소리가 다르게 들린다고 신기해했다. 정말 행복했다. 보름 정도 한국말을 혼자서 독백처럼 중얼거리던 터라 대화를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은 한국어가 그리웠었던 모양이다.
자신타 일행은 오늘 여기 부르고스에서 하루 더 머물 계획이라고 했다. 어제, 자신타에게 이젠 혼자 걷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그녀는 메일을 보낼 테니 며칠 후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또 동행하자고 했다. 마음을 열어준 그녀가 참 고마웠다.
가톨릭 신자인 그녀는 지금 살고 있는 뉴욕으로 돌아가면 새 직장을 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아직 싱글이어서 자유로운 지금의 상황을 잘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새로운 미래를 위해서 재충전할 중요한 시간으로 이 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배려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기념사진 한 장을 남기고 헤어졌다.
영훈 씨와 커피를 마신 후 출발하자고 했는데 자신타와 작별 인사가 지체되었다. 영훈 씨가 오래 기다렸는데도 감사하게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자판기 커피와 빵 하나를 사 들고 잠시 공원 길가에 앉아서 쉬었다. 출발도 하기 전에 빵을 다 먹도록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음악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우리는 대화를 끊을 수 없었다. 또 하나 영훈 씨는 그동안 스페인 사람들과 바(Bar)에서 식사를 많이 했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순례자 메뉴를 먹었는데 든든하다면서 그 식단에 반할 거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기회가 되면 한 번 먹어보아야겠다.
그리고 메뉴를 먹으면 와인이나 물을 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술도 담배도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알아서 물을 챙겨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혹시 목사님이라도 오셔서 포도주를 사 주시면 모를까 알코올은 먹지 않으려고요.” 하는 것이었다. 뒤에서 걷다가 얼마나 웃음이 나왔었는지.
“그럼, 제가 오늘 와인 한 잔 사드려야겠네요.” 해버렸다. 영훈 씨가 많이 놀라워했다. “네~?” “제가 오늘 사드리죠. 와인 한 잔.”
오후 12시가 되어 도착하게 된 마을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바(Bar)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 카페는 두 시에 문을 연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좀 더 걷겠다고 결정했다.
기다릴 시간만큼 더 걸어서 다음 마을에서 순례자 메뉴를 먹고 싶었다. 먼저 바(Bar)로 향했다. 그런데 이곳은 두 시부터는 메뉴를 하지 않는다며 샌드위치를 먹겠냐고 하는 것이었다. 두 시 1분 ~ 2분 정도밖에 안된 것 같았는데, 서운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그냥 밖으로 나왔다. 빵은 우리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베르게 옆에 있는 교회 입구 넓은 곳에서 비를 피하며 빵을 꺼내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어제 숙소에서 만났던 레게머리 친구도 그곳에서 빵을 먹고 있었다. 인사를 건넸는데 그는 조금 더 걸어갈 것이라고 하여 또 헤어졌다. 알베르게의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알베르게는 따뜻하고 포근했다. 아래층 벽난로 앞에 비에 젖은 옷가지들과 신발들을 모두 가지런히 널어놓고 저녁 식사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저녁에는 맛있는 순례자 메뉴를 먹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자신타가 부르고스에 남겠다고 했을 때 한편 아쉽기도 했다. 그러던 찰나 영훈 씨를 만나다니, 얼마나 기막힌 타이밍인가. 내 걸음이 많이 느리다고 말해 줬지만, 그는 ‘프랑스로 가는 비행 날짜만 맞추면 되니까 함께 가 보죠’라고 말해 주었다. 잘 따라 걸을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했으나 혼자는 도저히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에 함께 걷고 싶었다. 일행이 있으면 신경을 더 써야 할 부분이야 있겠지만, 혼자 가는 외로움보다는 신경 쓰이더라도 함께 걷는 쪽을 택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때로 호흡이 잘 맞기도 때로는 잘 맞지 않기도 하겠지만, 양보하고 또 챙기면서 가다 보면 좋은 점도 많을 것을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다. 진심으로 고맙다. 내가 더 많이 의지하게 될 것 같다.
열여덟째 날.
Hornillos del camino - Castrojeriz 21km. 카스트로 헤리스 Castrojeriz
오전 6시 기상. 오전 8시 출발.
어제는 걷는 내내 그리고 잘 때까지 영훈 씨와 꿈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는 다른 성향의 신앙을 가진 듯 보여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정말 명랑 쾌활한 청년이었다.
큰 비는 아니었지만 제법 비가 많이 왔다. 공기가 시원해졌다. 추위도 살짝 느껴지는 청량한 날이었다. 점심으로 빵을 사서 알베르게 앞에서 먹고 있을 때, 부르고스에서 보았던 레게머리 친구가 우리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가 우리 옆에 가방을 풀고 잠시 쉬길래, 간식을 나누어 먹었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인데도 기쁘게 받아주는 그 사람을 보고 영훈 씨가 오히려 더 기분이 좋다고 했다. 주는 사람을 기쁘게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났다.
열아홉 번째 날.
Castrojeriz - Fromista or campos 29km. campos 알베르게
오전 7시 기상. 오전 9시 출발.
어젯밤 머문 카스트로헤리스 알베르게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연인이 숙소를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세계 여행을 하던 중이었는데, 현재는 이곳 스페인에서 까미노의 오스피탈레라, 오스피탈레로의 경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손 뜨개질로 만든 모자와 양말과 팔찌와 목걸이 등을 알베르게에 전시해서 판매를 하고 있었다. 영훈씨는 이 친구와의 대화가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에 9시경 출발하자고 했다. 오전에 여유 있게 출발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연인이 함께 알베르게에서 근무하는 것이 꽤 좋아 보였다. 먹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해 준다고 했다. 알베르게가 소속되어 있는 교회나 관공서에 연락해서 가능한 기간을 타협하여 지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나와 영훈 씨는 둘 다 이 일에 관심이 생겼다. 내게 오스피탈레라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일 것 같았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내 경험도 나누고 다양한 나라의 순례자들을 사귀는 것도 신나는 일일 것 같다. 꿈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제 알베르게는 침대가 나란히 붙어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다음부터는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침대를 피하고 싶다. 내가 잠으로 빠져드는 순간까지 끙끙대는 소리를 내곤 하는데, 영훈씨가 컴퓨터 로그인하는 것 같다고 놀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조금은 코도 골았나 보다. 놀림감이 늘어났다.
길은 여전히 길었다. 그리고 참으로 예뻤다. 부르고스 이후로 아직까지는 길이 그리 힘들지도 않았다. 우리는, 한 번 더 이 길에 온다면 어떻게 걷고 어떻게 여행하면 좋겠는지 꿈을 이야기했다. 29km 나 되는 길을 걸었지만, 쉬지 않고 노래를 부르면서 걸었기 때문인지 힘든 줄 몰랐다. 때로는 따로 또 때로는 함께 걸었다. 생각나는 노래를 할 때마다 서로가 마음이 닿는 아름다운 가사를 되뇌었다.
마침내 머물기로 예정했던 동네에 도착해서 알베르게를 찾았다. 그런데 어렵게 찾은 알베르게의 문이 닫혀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지나가시던 한 어르신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뭐라고 설명을 하시는데 바(Bar)에 가면 오스피탈레로가 있을 것이고 그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의 설명을 듣고 단 번에 바(Bar)를 찾았다. 오스피탈레로와 함께 그의 가게에서 스파게티 재료를 구입하고 열쇠를 받아 들고 알베르게로 왔다.
문을 열고 들어 온 우리는 알베르게 내부를 단숨에 우리만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영훈씨가 자신의 엠피쓰리를 컴퓨터의 스피커에 연결해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우리 둘 만 있었기 때문에 침실을 선택하고 침대와 침대 사이에 스피커를 두어서 자면서도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잠시 피곤을 풀고 스파게티를 준비해서 채소 수프와 토마토 참치 소스에 푸짐하고 따끈한 저녁식사를 해 먹었다. 편안하고 풍성한 것이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까미노의 또 하나의 귀한 선물을 만났다. 남은 시간 중 20일을 함께 보낼 친구다. 영훈씨는 참 순수하고 또 나이에 비해 어리지 않아서 좋다. 본인과 다른 의견에 대해서도 들을 줄 아는 귀와 자세를 가지고 있다. 물론, 여전히 조심스러운 부분은 있다.
내일은 33km에 도전하려고 한다. 영훈씨가, 보다 평탄한 길에서 많이 걸어 놓은 후에 뒤쪽으로 가서 더 여유를 갖고 걷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나를 설득했다. 오늘도 너무나 고마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