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나를 부르다
스물세 번째 날.
Mansilla de las Mulas - León 19km. 레온 León
오전 7시 기상.
아침부터 순례자들끼리 어젯밤 다 하지 못한 인사를 나누었다. 리사와 유씨 부부는 6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노부부이다. 어젯밤 내 노래를 들으셨다며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칭찬해 주셨다.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서 묶은 리사는 정말 애교가 많은 사랑스러운 아내이다. 그녀의 남편 유씨도 듬직해 보이는 외모인데 애교가 무척 많은 분인 듯하다. 두 분의 대화는 옆에서 보는 이도 흐뭇하게 했다. 언제 또 만날지 모를 모든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늘의 길로 들어섰다.
알렉산드라와 영훈씨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내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즐거워했다. 어제 하모니카 연주를 했던 분을 바(Bar)에서 만났다. 그의 이름도 산티아고라고 했다. 하모니카 산티아고는 명함까지 보여주시면서 이름을 확인해 주셨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산티아고를 두 명이나 만난 것이다.
집에서 출발한 지 벌써 4개월이 된 독일인 친구 죠(Joe/독일. 28세)와도 동행했다. 죠는 부르고스에서 처음 만났던 그 레게머리 친구이다. 어제도 함께 식사를 만들어 먹긴 했지만 길게 인사를 나누지 못해서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친구다. 낡을 대로 낡은 텐트까지 묶여 있는 그의 가방은 거의 20kg은 훌쩍 넘어 보이고 엄청 무거워 보였는데 거기에는 정말 없는 것이 없었다.
레온에 거의 다 왔을 때 길 건너에 표시된 노란 화살표를 발견했지만, 일행은 길을 건너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먼저 걸어간 나그네들이 친절하게도 길을 건너지 않고 진행방향의 길을 걸으라는 의미로 또 다른 화살표를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살표를 보고 마음 놓고 걸어가던 일행은 얼마 가지 않아서 결국, 건너편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건널목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도로 한가운데 충격 방지용 구조물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길고 길게 늘어져 있었다. 뛰어넘어야만 했다. 키가 큰 알렉산드라와 영훈 씨는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상체보다 큰 가방을 메고 다리를 번쩍 들어야 하는 나에게는 상당히 무리였다. 자동차가 오는지 확인하고 소리소리 질러대면서 길을 건넜다. 혼자 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무단횡단. 군중심리 무섭다.
지나치던 다른 순례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죠가 나타났다. 그와 함께 알베르게를 찾아 출발했다. 시내 한가운데에서 알베르게 표시가 두 갈래로 나오는 화살표 앞에서 다시 한 번 망설였다. 그때, 우리는 가지고 있던 동전을 꺼내 재미로 던졌다. 공립 알베르게로 결정하고 찾아갔다. 건물 외관이 아주 아주 깨끗하고, 인터넷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방도 깔끔하고, 무엇보다도 따뜻해서 좋았다. 네 사람이 한 방을 배정받아서 더욱 좋았다.
우리가 모두 알베르게에 만족스러워하며 씻고 방으로 들어오는데 리사 부부가 등록을 마치고 들어와 계셨다. 반갑게 인사를 하던 리사는 우리들 네 사람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싶다며 써달라고 했다. 그래서 아는 대로 이름을 적어드렸다. 덕분에 오늘 두 분의 이름 철자도 정확히 알게 되었다.
이 알베르게의 큰 단점은 부엌이 없다는 것이었다. 휴게실에 전자레인지가 전부였다. 죠를 제외한 우리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가서 동네를 구경하고 케밥을 사 먹었다.
죠는 신발의 밑창을 고치는 데 8유로를 썼지만, 할 수 있다면 먹을 것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그는 하루에 사용할 금액을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재료를 구입해서 요리를 해 먹었다.
그는 전자레인지 하나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었다. 오늘도 죠는 전자레인지를 이용해서 식사를 했다. 위험하지 않은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대단해 보였다.
밤이 늦도록 이야기도 나누고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 방 번호는 14번이었는데 죠가 신이 나서 호텔 캘리포니아를 부르며 ‘웰컴 투 더 룸 넘버 14’를 외쳐댔다. 곧 모두에게 전이되어 함께 부르기도 했다. 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 같은 밤이었다.
둘씩 뭉쳐서 다니는 것도 꽤 재미있고 괜찮다. 가끔씩 지쳐가는 알렉산드라에 맞추어 천천히 걷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느리디 느린 나를 더 많이 기다려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걸어서였을까 등과 어깨의 통증도 덜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픈 등은, 아마도 비 때문에 침낭을 가방 안으로 넣었던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부터인 듯하다. 그 전에는 침낭을 가방 밖의 머리 부분에 묶어서 다녔기 때문에 가방 전체가 등을 짓누르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아픈 등을 참으며 걸었던 지난 며칠 동안, 주변 풍경을 보면서도 멋진 경관을 보고도 멋지다고 느끼지 못했었다. 오늘에서야 컨디션을 되찾아 걸으면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스물네 번째 날.
León - San Martin 산 마르틴 San Martin
오전 7시 10분 기상. 오전 8시 25분 출발.
알렉산드라와 죠 두 사람과 함께 출발했다. 바(Bar)에 들러 커피 한 잔 마시고 하루를 시작했다. 알렉산드라는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 밀크커피)를 좋아했다. 우리도 출발 전 커피 한 잔 즐기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줄도 알게 되었다.
점심 식사를 위해 좋은 자리를 찾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오늘은 좋은 자리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버스 정류장이다.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는 시골 정류장은 지나는 사람이 별로 없어 한적하고, 의자가 있으니 앉아서 먹을 수 있어서 편했다.
산마르틴에 도착해서는 두 개의 알베르게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부엌도 있고 따뜻한 곳이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두 곳이 모두 따뜻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라가 부엌은 없어도 좋으니 좀 더 깨끗해 보이는 곳으로 선택하겠다고 했다. 영훈과 나 그리고 죠는 양쪽 모두 추워 보이는 것은 똑같아 보이니 부엌이 있는 곳으로 택하자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선택한 알베르게는 추워도 추워도 너무 추운 곳이었다. 먼저 도착한 스페인 순례자가 알베르게를 뒤져서 바게트 빵 두 개정도의 두께를 가진 정말 작은 난방기를 찾아내어 고쳐서 켜 놓고 있었다. 그 난방기가 어찌나 작은지 중학교 교실 두 개만 한 크기의 이 방에 온기를 채우기에는 택도 없었다.
내가 너무 추워하자, 죠가 침대를 움직여서 다른 나그네의 침대와 나란히 마주 보게 놓고 그 가운데에 난방기가 있도록 해 주었다. 네 명 모두의 침대로 난방기를 둘러싸면 어떻겠냐고 했지만 다른 두 사람은 귀찮았는지 그대로 있겠다고 했다. 추울 텐데 미안했다.
샤워를 하던 영훈이가 놀라면서 뛰어 들어왔다. 샤워실에서 씻고 있는데, 뒤쪽이 썰렁해서 돌아보니 천정 벽이 뚫려 있었다는 것이다. 가서 보니 놀랄 만도 할 만큼 음산했다. 한적한 시골의 폐교 같은 알베르게도,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함께 만들어 먹어서인지 먹는 것마다 맛있고, 추위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
스물다섯 번째 날.
San Martin - Astorga 18km. 아스트로가 Astorga
오전 7시 기상. 오전 10시 출발.
여유롭게 출발을 하였는데도 오후 4시 30분이 되어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컨디션도 좋았고, 날씨도 지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뜨거웠고, 23km 정도 걸어서였는지 몸도 가벼운 여정이었다. 고속도로 옆길로 걷는 바람에 차들의 매연을 마시기도 했고, 큰 경적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경치가 괜찮은 편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조금 멀리 돌아서 걷긴 했지만,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걸었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죠는 중간에 만나기는 했는데 헤어져서 놓쳐버렸다. 하지만, 결국 알베르게에서 모두 만났다.
영훈과 서로 친구가 되어주고 함께 걷고 때론 사색하며 노래하며 자신의 걸음에 맞게 먼저 걷기도 하면서 지낸 것이, 벌써 일주일 째다. 어느 때는 낯선 사람 같기도 하고, 어느 때는 친동생 같기도 하다. 영훈 씨는 어떤 스페인 사람을 만나도 늘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섯 단어만 알면 즐거워지는 카미노 여행, 다섯 문장을 알면 스페인에서 삶도 가능하다, 일단 뱉고 보세요 생활 여행 영어, ‘정신 못 차리지~ 정신 못 차리고 또 그런다~ ’ 등 우리만의 유행어를 만들어서 여행길에서 지루함은 덜어내고 즐거움은 더 해주고 있다. 그의 재치가 기분 좋게 한다. 그의 여유로움이 부럽다.
죠는 채식주의자이다. 내가 채소를 좋아하는 것이 그에게도 기쁨인가 보다. 어쨌든 그는 우리가 즐겨 먹는 소시지를 넣은 수프조차도 먹지 않는다. 길 옆의 민들레를 예뻐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웃는 그는 참 다정다감하다. 때로 생각을 거침없는 말투로 뱉어낼 때에는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의 순수함은 인정한다.
알렉산드라는 밝고 환하다. 외국인이란 느낌 없이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한국인 친구 같다. 때때로 내가 챙겨주면 엄마 같다면서 ‘네~엄마’ 하곤 한다. 너무 챙기는 나의 버릇이,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나이 어린 친구가 마뜩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 미소 지으며 다정하게 대해 주어 고맙다.
저녁 식사로 볶음밥을 만들고, 찌개(햄, 스파게티면, 감자, 고춧가루, 달걀, 양파, 마늘)까지 끓여서 먹었다. 죠가 우리를 위해 따끈한 샐러드를 만들어 주어서 풍성한 식탁이었다. 저녁이 되자 반가운 순례자가 알베르게로 들어왔다. 리사 내외였다. 부모님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저녁에 퇴근하는 부모님을 만나는 어린아이 같이 기뻤다.
여행에서 만나는 자유로운 영혼들과의 교제는 매번 흥이 나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