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나를 부르다
스물여섯 번째 날.
Astorga - Rabanal del Camino 20km. 라바날 데 카미노 Rabanal del Camino
오전 6시 30분 기상. 오전 8시 10분 출발.
길을 걷다 화장실을 찾으려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는 걱정에, 되도록 간식을 잘 먹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침부터 화장실을 자주 가고 싶어 당황스러운 날이었다. 물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고, 음식을 많이 먹은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화장실을 자주 찾았다. 그나마 마을이 자주 있는 편이니, 바(Bar)를 이용하면 괜찮지 하는 생각에 안심하며 걸었다.
어느 마을인가 도착했을 때,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찾아보는데 마침 마을 입구에 바(Bar)를 안내하는 표시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온 힘을 다해서 잰걸음으로 속도를 냈다. 저 멀리 문 앞에 메뉴가 적힌 큰 입간판이 보였다. ‘옳지! 열었구나~’ 하면서 좌우를 살피지도 않고 그곳만을 향해 무조건 직진했다. 거의 앞에 다다랐을 때, 아차 싶었다. 아직 셔터가 내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안돼! 안돼! 열려야 하는데’ 하며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걸음은 멈추지 않고 오직 열릴 것이라는 기대 하나로 그곳을 향해 직진했다.
드디어 그 문 앞에 도착한 바로 그 순간, 무대의 막이 오르 듯 셔터가 올라가고 할아버지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등에 멘 배낭을 문 옆으로 휙 벗어던지며 머리를 구부려 인사를 하는 모양을 하고서는 문을 열면서 “실례합니다, 화장실 좀..”라고 외치면서 할아버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흘끔 보시며 턱으로 화장실 방향을 가리키셨다. 턱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재빠르게 달려갔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머릿속에는 온통 화장실 생각뿐이었고,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겨우 진정되어 화장실 밖으로 나와 보니 어제 알베르게에서 함께 묵었던 스페인 청년 두 사람이 커피를 주문하고 있었다. 살짝 눈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나오자마자 알렉산드라가 화장실로 향했고, 그 뒤를 이어 영훈 씨까지 당당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늘 그 바(Bar)는 개시를 하자마자 세 명이 줄지어서 화장실만 이용했다. 정말 미안했지만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나왔다. 스페인 청년 두 사람이 커피를 주문한 것이 고맙기까지 했다. 그냥 커피라도 마실 걸 참 못났다. 죄송하다.
화장실이 원수 같은 날이었다. 그 이후로도 화장실을 또 급하게 찾게 되었다. 이번에도 바(Bar)를 찾아갔는데 안타깝게도 그곳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일반 가정집 문을 두드렸다. 때마침 개 한 마리가 달려와서 짖어대어 무서운 나머지 급한 마음으로 문이 열릴 때까지 계속 두드렸다.
다행히도 대문은 열렸는데 화장실 문까지는 열 수 없었다. 급해서 두드리기는 했지만, 사실 지나가는 나그네한테 화장실을 내어준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짖던 개를 쫓아낸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결국 화장실을 이용하지 못하고 영훈씨가 기다리는 곳으로 다시 왔다. 알렉산드라가 합류했고 잠시 쉰 후 출발했다. 화장실을 찾지 못해 점점 지쳐가는 나를 보면서, 영훈씨와 알렉산드라는 자연 화장실을 이용할 때가 되었다면서 더 이상 몸을 괴롭히지 말라고 했다. 정말~ 저엉~마알~ 그러기 싫어서 참고 또 참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자연의 품으로 뛰어 들어가야 했다. 자연이, 나를 살려 주었다.
그 와중에도 체면을 살려야 했을까. 무슨 소리. 루에스타에서 사냥꾼의 총소리에 놀라 주저앉던 그 순간부터 이미 체면을 생각한다거나 무슨 기품 있는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아예 버렸던 터이다. 두 사람은 자연과 만나고 돌아온 자연인을 환영해 주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더 가볍게 걸었다. 이렇게 가벼운데 뭘 그리 혼자 낑낑 대었을까. 화장실 수난의 시간을 치르면서, 라바날에 도착했다.
이곳은 영훈씨가 수일 전부터 특별히 기대했던 곳이다. 나와 만나기 전에, 동행했던 스페인 친구들 중에 안토니오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가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라바날 동네 안에 다다랐을 때였다. 동글동글한 얼굴의 스페인 남자가 어느 호텔 문 앞에 나와 서 있다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환한 웃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금방 안토니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영훈씨는 한 걸음에 달려가서 반갑게 안토니오에게 안겼다. 오랜만에 만나는 혈육 마냥 기뻐했다. 이상하게도 보는 이의 가슴까지 찡했다.
저녁 식사 때 다시 가기로 하고 먼저 알베르게를 정하기 위해 돌아섰다. 그동안은 공립 알베르게가 가격도 싸고 깔끔했기 때문에 대부분 공립에서 지냈었다. 그러나 이 번에는, 똑같은 가격인데 공립 알베르게보다 사설 알베르게가 훨씬 시설이 훌륭해 보여서 그곳으로 정했다.
들어서자마자 반가운 친구들을 또 만났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처음 만났던 아그네스였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요하네스라는 독일 청년과 함께였다. 그리고 아스토르가에서 만난 스페인 청년들도 있었다. 반가이 인사를 나눈 뒤, 죠는 식사를 직접 준비하기로 했고 우리는 안토니오의 식당으로 향했다.
안토니오의 호텔은 작지만 아담하고 예뻤으며 1층에는 바(Bar)를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 아주 편리하게 이용 가능한 곳이었다. 저녁 식사 메뉴를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 전이었는데도, 안토니오는 배고픈 순례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주문을 받아주었다. 맛있는 음식은 나그네들을 크게 만족시켰다. 감사했다.
이 긴 여행의 까미노 위에 살고 있으면서 나를 기다려주는 친구 하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부러웠다. 이 두 사람도 언어로는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했지만, 영훈씨가 알고 있는 단 몇 개의 스페인 단어와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표현으로 충분해 보였다. 얼마나 신기하고 흥미로운지는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발바닥이 아파 온다. 어깨만 괜찮으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모든 기관이 순차적으로 통증을 호소하고 있다. 하나씩 차근히. 내일은 33km를 걸을 것이다.
스물일곱 번째 날.
Rabanal del Camino - Ponferrada 34km. 폰페라다 Ponferrada
오전 7시 기상. 오전 8시 30분경 출발.
길 위에 오르기 전, 한 번 더 안토니오의 호텔에 들렀다. 식사를 마친 우리에게, 안토니오가 빵을 몇 개 더 챙겨주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서 들른 것뿐인데, 순례자들의 먹거리도 잊지 않고 채워주셨다. 이 따스한 정. 순례자들과 나누어야겠다.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날이 있었던가 할 정도로 좋았다. 어깨, 등, 발이 골고루 약간씩 피곤한 정도의 하루였다. 특별히 더 아픈 곳도 없는 날.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산을 오르고 올라야 했기 때문에 약간 지루하기는 했다. 끝인가 싶으면 오르고 끝인가 싶으면 오르고. 그런데, 오르면 오를수록 눈부시게 짙푸른 하늘이 마음으로 스며 들어왔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실로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멋진 산과 시원한 바람이 상쾌했다. 중간중간 걸음을 멈추고 서서 짙고 푸른 하늘과 웅장한 산자락들의 황홀함에 젖어 사진기를 들이대느라 정신이 없이 서성이면 영훈씨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 오세요. 여기가 더 멋져요.” 그렇게 약 두 시간 정도 계속 오르막길로 산을 올랐다.
어떤 말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사진기로도 담아내기 힘들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저 그 산을 보고, 펼쳐진 산 아래를 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들이 건네주는 편안함과 신비스럽기까지 한 그들의 매력을 선물로 받을 뿐, 그 어떤 찬사로도 보답할 수 없었다. 우리가 가진 사진기는 그들의 멋진 장관을 담아내기에 부족했다. 우리의 눈에 모두 담는 것도 어려울 것이었다.
오르막길의 끝인 줄 알고 기쁨의 탄성을 질렀던 곳에 이르러, 멀리 설산의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 높은 돌 더미 위의 십자가봉이었다. 봉우리 위의 높은 십자가는 그 위엄 앞에 모두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죠였다. 곧 알렉산드라도 도착했다. 우리가 주위를 둘러보며 간식을 먹는 동안 알렉산드라는 봉우리 십자가 밑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나그네의 걸음을 자신의 안으로 품는 봉우리가 놀라웠다. 잠깐 쉰 후 시간차를 두고 헤어졌다. 알렉산드라는 어제부터 무릎의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산이 많이 힘들 것 같아 걱정되었다.
아세보라는 곳에 다다랐을 때쯤, 아담하고 예쁜 이 동네의 바(Bar)에 들렀다. 폰페라다에 못 미쳐서 마을이 하나 더 있었는데, 무릎이 아팠던 알렉산드라가 이 마을에서 머물러야겠다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더 걷겠노라고 하고 아쉬운 인사를 나누었다. 알렉산드라가 몸이 좀 나아지면 하루 이틀 사이에 만날 수 있거나 혹은 산티아고쯤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헤어졌다.
많이 아쉬웠다. 나중에 죠에게 들어보니 좋은 알베르게로 갔다고 해서 편하게 쉴 수 있겠다 싶어 다행스러웠다. 산티아고에서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폰페라다는 생각보다 그리 녹녹지 않은 동네였다. 분명히 저만치 도심이 보이는데 우리가 가는 길은 도심을 가운데 두고 빙빙 돌고 있었다. 동네가 보이는데도 길은 우리를 계속 맴돌게 하더니 결국 해가 졌다. 다행히도 산책을 나오신 두 분의 동네 어르신이 우리를 알베르게까지 안내해주셨다.
이 알베르게는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곳이었고, 아주 훌륭했다. 죠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방으로 가는데 화장실에서 나오는 여자분을 보는 순간 멈칫했다. 딱 한국인 같았다. 그분들도 나를 알아보셨다. 지혜씨와 그녀의 어머님이셨다. 영훈씨 이후로 만나는 한국 분들이라 더욱 반가웠다.
또 하나 반가웠던 것은 이 알베르게에 훌륭한 부엌이 있다는 것이었다. 영훈과 죠와 우선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흠뻑 흥에 겨운 세 사람은 무어 그리 즐거웠던지 알베르게를 나와서 주차장 한가운데를 지나며 폴짝폴짝 뜀을 뛰고 춤을 추고 난리가 아니었다.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다는 즐거움에 그리고 다시 한 알베르게에서 묵게 되었다는 반가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라를 남겨두고 앞서 걸어가야 하는 마음이 씁쓸하다. 그녀는 꼭 다시 만나야 할 사람이라고 마음 한 편 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