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나를 부르다
여섯째 날.
Sangüesa-Monreal 25km. 몬레알 Monreal 알베르게
알베르게를 출발하기 전, 고민 고민하다가 짐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검은색 니트와 운동복 바지, 양말 한 켤레를 고이 접어 침대에 두고 나왔다. 막상 줄이긴 해야겠는데 무엇을 줄여야 할지도 모르겠고, 도무지 필요 없는 것이 생각나지 않아 한참 고민했다. 바람막이 점퍼가 있으니 니트는 버려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까웠지만 그것이라도 없으면 가방이 가벼울 것 같았다. 또, 알베르게에 그렇게 두고 오면 필요한 다른 순례자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침낭과 일용할 양식 그리고 구급약과 노트와 필수용품들만으로도 가방은 가득했다. 그렇게 많은 것을 덜어 내었음에도 걷다가 또 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
이 길은 끝내 가볍게 걷기를 요구한다.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두운 7시에 또 하루를 시작했다. 아무리 어둡더라도 산길만 아니라면 걸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 함께 머문 길버트 아저씨도 곧 출발해서 나올 테니까 걱정 없다고 생각되어서 아직 어두웠지만 씩씩하게 출발했다.
새벽의 신선한 공기가 마음까지 가뿐하게 했다. 얼마 걷지 않아 철교를 만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그러나 곧 웃음이 터졌다. 해가 떠서 환히 보였다면, 분명 그 철교를 혼자 건너지 못하고 그곳을 지나칠 그 누군가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철교 양편의 물소리만 들리고 다리의 높이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건너는데 무리가 없었다. 내겐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우습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다음에도 이렇게 씩씩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다리를 건넌 후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났다. 노란 화살표 두 개가 직진 방향과 우측 방향으로 각각 표시되어 있었다. 차도로 이어진 쪽은 환하고, 산으로 가는 쪽은 가로등이 없어서 컴컴했다. 주저 없이 환한 쪽을 택했다.
노란 화살표만 있는 쪽은 환해서 좋아 보였지만, 차도 옆으로 걸어야 해서 위험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쪽을 택했다. 산 쪽의 길은, 아직 어두웠기 때문에 날이 밝기를 기다리거나 동행자를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마냥 누군가를 기다리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환한 길로 조금이라도 더 걷는 편을 택했다.
그런데 이 길은 노란 화살표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 어차피 선택했으니, 좋다 어디 끝까지 가보도록 하자고 생각하고 들어섰다.
두 시간 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동네가 나타났다. 빌라 로마노. 얼마나 많이 왔는지 지도로 확인하려고 안내책자를 펼쳤다. 이를 어쩐다. 이 동네는 내가 가진 지도에 나와 있지 않았다. 어디쯤에 있는 마을인지 도통 모르겠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마을에도 여전히 노란 화살표가 보였다. 때문에 계속 걷기로 결정했다.
마을에 있는 화살표를 따라 걷다 보니 산책하는 동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친절하게 산티아고로 향하는 까미노를 안내해 주었다.
상쾌하고 멋진 산책로를 따라서 동네 어르신 한 분이 나를 앞질러 지나가셨다. 다른 동네 분들도 앞질러 가셨다가 되돌아오는 분들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느리게 걸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동굴을 만났다. 처음엔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불빛이 있겠지.~. 그렇겠지? 아닌가? 없나? 으악….’.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자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었다. 왜 불빛이 없을까. 그럼 앞서 간 모든 사람들은 어디로 갔다는 것일까? 아이참... 나만 이렇게 못 들어가는 건가 창피하게. 어쩔 수 없이 그냥 누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꼭 20분을 기다렸을 그때, 동굴 안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일어나서 인사를 하며 내가 가진 손가락 손전등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손을 저으면서 환히 웃으며 그냥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조금만 가면 된다는 듯 표시해 주었다. 자신만만하게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곧 풀이 죽은 채 다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좀 전의 그 사람들이 다가와 같이 가자고 했다. 고마웠다. 얼마 큼이나 걸었을까, 건너편에 멀리 엄지손톱만큼의 빛이 들어왔다. 거짓말 같았다. 심하게 꺾여 있어서였는지 빛이 안보였던 것이다. 그렇게 당황해서 나온 터널의 끝에는 입을 다물 수 없는 경관이 펼쳐져 있었다. Foz de lumbier. 눈앞의 계곡은 어두운 터널을 건너온 사람들에게 선물이었다. 웅장한 계곡은 보는 이를 압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계곡 길을 따라 산책하고 있었다.
멋진 계곡의 끝에는 터널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혼자서 걸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조금 더 환한 손전등이 없을까 생각했다. 전자 사전용 휴대전화가 생각났다. 터널 앞에서 가방을 열어 가방 안쪽에서 휴대전화를 찾아서는 좋아가지고 가방을 둘러맸다. 휴대전화를 켜고 터널 쪽으로 들어섰다. 터널 안으로 두 어 발이나 들여놓았을까? 눈앞에 동굴 건너편 빛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번 터널은 단 몇 걸음 만에 건너편의 빛이 바로 보였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손으로 막았다. 푸웃. ‘바보, 아까처럼 들어가 보려고 시도나 해보지. 무거운 가방만 내렸다~풀었다~올렸다.’ 차분하게 또 차분하게 그리고 침착하게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그래도 멋진 계곡을 볼 수 있었으니 괜찮다.
터널 이후에도 화살표는, 여전히 나를 차도로 안내했다. 문득 걷다가 앞을 보니, 산티아고 가는 길은 차도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리막길로 이어져 넓은 들판을 가로질렀다. 차도랑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오히려 차도가 크게 멀리 돌아가도록 만들어져 있고 인도가 훨씬 빠른 길이었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인데, 마치 나를 위해 조각을 맞추어 놓은 것 같아 왠지 기분이 좋았다.
한 대의 트럭이 지나치다가 다시 후진을 해서 다가왔다. 기사님은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지 말고 차도로 올라가라고 하셨다. 몇 번을 되물어 보면서 확인했으나 아저씨는 고개를 저으면서 차도로 가라고 하셨다. ‘오늘 처음 선택부터 지금까지 이미 지도대로 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선택했으니 아저씨를 천사로 여기고 한 번 따라보자’라고 생각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서 노란 화살표를 버렸다. 그때부터 더 이상, 정해진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 서 있지 않았다. 이제 노란 화살표도 버렸고, 천사가 가지 말라고 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기면서 차도 위로 걸어 올랐다.
그런데, 오전에 걸었던 차도보다 훨씬 위험하고 대형 트럭들도 많아서 더 이상 걷기가 어려워 보였다. 다행히도 운전기사 분들의 쉼터가 있어서 잠깐 쉬어가려 들어섰다. 그곳에 어떤 이가 차를 세우고 빵을 먹고 있었다. 천사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대해서 잘 몰랐다. 게다가 말도 잘 통하지 않았다. 그때, 또 한 대의 차량이 도착했고 기사분이 다가오셨다. 그는 이 길이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맞다고 하셨다. 첫 번째 만난 기사님이 자신이 갖고 있는 지도까지 꺼내셔서 지명을 짚어 주셨다. 언덕을 내려가면 이스코, 살리나스, 그리고 내가 갈 곳인 몬레알로 이어질 것이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다시 좁은 갓길에 서려고 하자 두 번째 나타났던 차량의 기사분이 다가오셨다. 차에 타라고 하길 래, 이스코쯤에서 내려 주시기를 기대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차에 올라탔다. 언덕길을 지나면서 창밖을 보니 아까 진입하려고 했던 밭으로 향하는 노란 화살표의 길이 모두 공사 중이었다. 트럭 천사가 까미노 표지가 있던 그 밭길로 가지 말라고 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스코까지 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다음 동네 살리나스에서 내려서 걷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스코 다음에 보이는 마을이, 이런 오늘 도착 예정지 몬레알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 아닌가. 살리나스는 이 차도에서 보이는 마을이 아니라 다른 쪽에 연결된 곳의 동네인 모양이었다. 기사님은 나를 몬레알로 데려다주셨다.
길을 잘 못 들어서 더 오래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걸었는데 오히려 다른 순례자들 보다도 빨리 도착하게 되었다. 감사하기도 하고,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반도 책갈피를 선물로 드렸는데 극구 사양하시고는 그냥 가셨다.
알베르게는 작고 아담해서 정감 가는 건물이었다. 커다란 나무 문을 열고 침실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누군가 다가와 반가이 맞아주었다. 아침에 헤어진 마르크였다. 숙소에 두고 나온 검정 니트를 내밀면서 “헤이, 이것?” 하면서 해맑게 웃는 것이 아닌가. 아이고 세상에. 정말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웃옷과 양말 한 켤레가 고스란히 다시 내게로 온 것이다. 아, 버릴 것이 아니었구나. 끝까지 가져가야 할 것들이라면 그럼 차라리, 무겁다는 생각을 버리기로 하자.
천사들을 참 많이 만난 날이다. 그렇게 걸어도 만나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그 사람들을 한 번에 많이도 만났다. 귀한 사람들. 오늘 처음으로 남에게 부탁해서 사진도 찍어 보았다.
4시가 되자 길버트 아저씨께서 나타나셨다. “정말 빠르구나.”라고 말씀하시는데 양심에 찔려서 사실을 말했다. 무릎이 아파서 버스를 타고 온 마르크에게 한방 파스를 붙여드렸다. 내일 부르고스로 버스를 이용한다고 하신다니 다시 뵙기는 힘들 것 같다. 여행을 마칠 때까지 건강하기를 기도한다.
노란 화살표를 놓치기도 했고, 또 버리기도 했다. 지도의 길대로 걷지 않았지만, 모두 선택이었다. 선택은 책임이 따르는 법. 작은 해프닝 덕분에 시간을 벌었고, 글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몸도 마음도 추스르고 있으니 더없이 고맙다.
아침나절, 산길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출발했었다. 그랬더니 마음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네 인생에는 그동안 산도 있었고, 바다도 있었어. 네가 등산도 할 줄 모르고 수영도 할 줄 몰랐지만 너는 모두 해냈지. 그게 인생이야. 내가 너와 함께 했단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눈물이 흘렀다.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를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내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언제나 주변의 도움과 누군가의 사랑이 동반되었다는 감사한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