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자의 행운

너무나도 빨랐던 미디어 관련 공공기관 지원.

by 김김이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말이 있다. 멋모르는 초보자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는 현상을 뜻하며, 주로 주식이나 도박, 스포츠에서 쓰이는 이 말이 내 인생에 처음 찾아온 건, 다름 아닌 '첫 취업 도전' 때였다.

나는 내 전공과 경험을 고려해 지원할 직무를 네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했다.


가. 미디어: 전공 활용

나. 교육: 봉사 활동 경험

다. 홍보/마케팅: 인턴 및 수상 경력

라. 환경: 독일에서의 경험


이 중 가장 간절했던 건 바로 미디어였다. 요즘시대에 누가 전공을 살리느냐 하겠지만, 나는 내 전공을 꽤 좋아했다. 성적이 우수했던 것은 아니지만, 수업들 모두 재미있었다. 강의실에서 교수님들은 입버릇처럼 "미디어의 변화는 가속화된다"라고 말했다. 특히 한 교수님은 늘 강조했다.


“세상의 중심이 어디로 이동하느냐에 대해 빠르게 선제 대응한 일론 머스크를 봐라. 인터넷 금융의 정점이었던 페이팔을 매각하고, 그는 이제 테슬라로 우주를 정복할 것이다.”


그때 테슬라 주식을 사라고 했었으면 내 인생이 바뀌었을 텐데, 교수님은 왜 우주 얘기만 하셨을까? 정작 본인은 10년 넘게 똑같은 교재와 못생긴 PPT로 강의를 하면서. 하지만 교수님의 예언은 적중했다. 설립 한지 17년 만에 테슬라는 주가가 700% 폭등하며, 전기차 시장의 장악을 넘어 스페이스X로 우주로 나아가고 있다.

모두 사실이었다. 종이신문을 들고 화장실에 가던 아빠의 손엔 이제 스마트폰이 들려 있고, TV 앞엔 먼지만 쌓여간 채 모두 핸드폰 속 짧은 숏폼에 집중한다. 미디어는 확실히, 빠르다.

그리고 미디어 공공기관의 채용 과정 역시, 그 속도만큼이나 정신없이 몰아쳤다.



자율성이라는 이름의 시험대


첫 관문인 서류 전형은 당황스러울 만큼 심플했다.


[자기소개]

※ 지원동기 등을 포함해 성실히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 A4용지 3매 이내(약 5,000자)로 본인이 직접 작성하고 출신학교 및 가족관계 등을 암시하는 내용 금지


항목이 정해진 기존의 자소서와는 달랐다. 높은 자율성은 곧 고도의 전략을 요구했다. 나는 스스로 6개의 항목을 설계해 5,000자가 들어갈 수 있는 넓은 빈칸을 채워 나갔다.


ChatGPT 같은 AI가 활성화되지 않은 시절이라, 오로지 내 기억의 저장고를 뒤져야 했다. 지원동기를 쓰기 위해 인생의 에피소드들을 탈탈 털었다. 살면서 기자를 세명 만났다. 각기 다른 일로 다른 언론사의 기자들에 대해서, 하나같이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던 기억을 서두로 던지고, 아무 역량 없는 가난한 신입의 단골 메뉴인 '소통 역량'을 메인으로 자기소개를 꾸며갔다.

하지만 자격증 점수로 정량화하여 합격시키는 정량평가가 아닌, 이런 정성평가에서 합격해 본 적이 없었기에 기대를 버렸다. 그런데 웬걸, 덜컥 합격이었다. 기쁨보다 덜컥 겁이 났다. 필기 전형에서는 정말 합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취업난 속 틈새시장과 얼떨떨한 합격


필기는 NCS, 법령 상식, 그리고 '논술'로 구성되어 있다. 논술이라니. 서류 합격결과 발표 이후 포털에는 기다렸다는 듯 취업 논술 강의들이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취업난 속 불안한 사람들의 소비심리를 자극하는 틈새시장이었다 그중 한 강사의 이력이 눈에 띄었다.


'다수의 공공기관 논술 합격, 브런치 작가 활동'


강사도 아닌 그 블로거는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취준생이었다. 전문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력으로 꽤나 고가의 강의를 팔겠다는 그 '포부'에 분노의 다짐을 했다. 절대 내 돈을 저기에 쓰지 않겠다고. 대신 내 오래된 전공 서적과 필기 노트를 다시 펼쳤다. 분노가 두려움을 이긴 것이다.


논술 주제는 평이했다. '기관 홍보'와 '민원 대응'. 얼떨떨한 마음으로 시험장을 빠져나오며 "이게 마지막이겠지"라고 낙담했는데, 일주일 뒤 결과는 다시 한번 '합격'이었다.



내 면접을 망치러 온, 구원자는 아닌 일론 머스크


면접은 1차 토론, 2차 PT 및 인성 면접으로 진행된다. 생전 처음 해보는 토론 면접을 위해 오픈채팅방에서 만난 얼굴 모를 스터디원들과 비대면 연습을 시작했다. 스터디 방식은 간단했다. 역할을 나누고 5분간 토론 준비, 그리고 20분간 토론 진행, 그리고 피드백. 생각보다 재밌었고, 비밀에 싸인 면접 전형에 대한 두려움을 나누며 묘한 유대감을 쌓았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정장을 입고 당도한 면접장의 대기실은 넓고 차가웠다. 내 수험번호가 불리고 입장한 시험장. 그곳에서 나는 '미디어는 정말 빠르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빔프로젝터에 띄워진 주제는 이것이었다.


"자본가가 SNS 또는 언론사를 소유해도 되는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지 채 사흘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사회적 이슈가 실시간으로 면접장에 투사된 것이다. 혁신의 아이콘, 변화의 아이콘, 시대를 앞서가는 아이콘 일론 머스크가 내 면접을 망치려고 나타난 것이다.


"토론 시간은 20분입니다. 지금 바로 시작하세요."


스터디 때처럼 준비 시간도, 펜도, 종이도 없었다. 주제를 해석할 틈도 없이 사회자와 반대 의견은 역할은 선점되었고, 내게 남은 건 '찬성'뿐이었다. 미디어에서 표현의 자유는 근본이다. 그러니 이 주제에서는 반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쏟아지는 반대 측의 공격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자본가들이 소유한 각각의 개별 언론사들이 서로를 견제해 오히려 광고에 좌지우지되는 것보다 표현의 자유가 더욱 보장될 수 있다.’는 내 의견은 가볍게 무시되었고, 상대측 공격에 대한 답변만 힘없이 늘어놓다 보니 20분이 증발해 버렸다. 모든 것이 다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다.

이어진 개인 면접에서도 전직 기자, 타 기관 경력직 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 신입인 나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초라해지는 것도 그렇게 빠를 수가 없었다. 그 초라함은 이어진 ‘인사발령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라는 개인 질문에 까지 영향을 끼쳐 횡설수설 답변 한 후 내 첫 면접은 끝이 났다.

2차 면접 기회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행운이 떠난 자리


그날의 주제들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시의성을 품고 있었다.

‘촉법소년 폐지 여부, 불륜과 관련된 20년 전 기사에 대한 잊혀질 권리, 재난 보도 시 피해자 초상권 공개 여부 등‘


기업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경험이 모자랐던 탓이었을까. 지금 돌아보면 인사권에 대한 질문도, 토론의 논거도 더 잘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 종종 그때를 곱씹는다. 지금이라면 더 잘 대답할 수 있을 텐데.


초심자의 행운은 시작을 도와주는 다정한 선물이다. 하지만 그 선물을 결실로 바꾸는 것은 결국 단단한 실력의 몫이었다. 나는 행운 덕에 면접장 문턱까지 갔지만, 빠른 속도감을 견뎌낼 실력은 갖추지 못했던 셈이다.


초심자도, 그렇다고 노련한 전문가도 아닌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지금. 나는 밤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의 행운이, 조금은 영악해진 지금의 나에게도 다시 찾아와 줄까?